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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전혀 예기치 않게 집에다가 내부 리모델링을 하게 되었다. 계획하지 않던 일이니 준비가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전년부터 계획된 중국 곡부로의 유교문화 답사 일정과 새 단장에 따른 이사가 겹쳐서 짐 갈무리도 못하고 여행 가방만 간신히 싸서 다녀왔다. 여행 동안에 편안하지 못한 심사는 그렇다 치고 문제는 귀국 뒤의 생활이다. 집안의 짐이 모두 이삿짐센터에 가 있으니 신발은 외국 여행 때 신고 갔던 트레킹 화 한 벌이요, 옷도 여행 때 입을 요량으로 캐리어에 담아 두었던 것이 전부이다. 여행 복장이라 외출복은 고사하고 속옷까지 부족하다. 어디 그뿐인가. 공사하는 집에 들어서도 비누 한 개 수건 한 장이 없으니 손을 닦고 말리는 일까지 모든 것이 불편하기 짝이 없다. 평소 손 주변에 있기에 편하게 사용하던 물품이 이리 소중한지 몰랐다. 응당 있어야 할 것이 없으니 그 불편함이 자심하다.

리모델링할 동안에 공사하는 사람이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주인은 할 일이 없어도 그 사람들 일 마칠 때까지 주변에서 얼쩡거려야 한단다. 일의 진척과 성의를 체크하는 척 하라는 건데 문제는 내가 쉴 편한 장소가 없다는 거다. 내 집에 발 뻗을 곳이 없어 점심 후 피곤한 몸을 바로 집 앞에 주차된 차 안에 옹송그리고 앉아 있으려니 쉬어도 쉬는 것이 아니다. 2월 말의 차가운 날씨도 문제려니와 바닥에 주욱 펴지 못하고 있어 그런지 피로가 가시지를 않는다. 이따금 따스한 목욕탕에 가서 다리를 쉬게 해 주는 것이 우리의 궁여지책인데 작업이 늦게 끝나는 날이 거의 대부분이라 절실한 목욕탕도 그림의 떡이다.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고대광실도 아니요 단사표음에 초가삼간일지라도 그저 편히 쉴 공간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 뿐이다. 내게 익숙했던 집의 가치를 새삼 느끼게 되는 순간이었다.

사물에서 외연을 확대하자 내게 가장 익숙한 집사람이 보인다. 장학사 시절에 친구랑 거추장스러운 마누라를 서로 바꾸자는 농을 했더랬다. 그런데 잠시 후 이구동성으로 나온 말은 '야! 아무래도 안 되겠다. 그동안 교육 시킨 것이 너무 아까워!'였다. 그렇게 내 위주로 생각하던 사람인데 집안일을 상의하고 일의 두서를 정리하면서 정작 아내의 말에 들을 만한 말이 아주 많다. 우리 마누라가 이리 훌륭하던가· 가까이에 있어 진가를 모르고 지냈다. 이것도 익숙함의 병폐이리라.

어머님은 어떤가. 젊은 나이에 남편을 보내고 자식을 위하여 일생을 헌신하느라 정작 본인의 행복을 모르고 평생을 지내오신 터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아려오는데, 나이가 많이 드신 지금은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지낸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요 퇴계 선생의 존경을 받았던 농암 이현보 선생이 별당의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이라 지은 뜻이 노부의 늙어 감을 아쉬워하면서 살아계신 하루하루를 소중히 여기자는 마음이며, 부모님이 살아계시니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돌아가실까 두려운 것을 희구지심(喜懼之心)이라 하는데 내 마음과 똑같다. 이제는 동생들도 자칫 나보다 먼저 떠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생겨 슬며시 불안해 진다. 60년 넘게 가까이 지내왔는데 혹 먼저 가면 어쩐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한 줄을 이미 알았기에 옛 사람들은 걸을 때에도 개미집을 돌아가듯 발걸음을 조심하라 했나보다. (擇地而蹈 折旋蟻封) 미물까지 살펴주는 마음이 거경(居敬)의 단초가 아니런가.

내 옆에 있다는 것이 이리 고맙다. 내게 속한 것은 모두 연이 있어 있어주는 것임에도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익숙함에 젖어 있어 고마운 줄도 몰랐다. 있어만 주면 고맙고 이에 더하여 무탈하게 있기만 해도 행복한 거다.

익숙한 것에 감사는 못할지언정 익숙하다고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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