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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규

전 상당고 교장·교육학박사

대문 바로 앞에 자그마한 텃밭이 있다. 문전옥답도 아니요 다산 선생이 말한 대로 유인(幽人)의 집 앞에 있는 10평도 안 되는 남포 밭이다. 이 밭을 평생 바람이었던 전원주택의 선물로 여겨 이사한 후 서너 해는 고추, 가지 그리고 파프리카에 호박이랑 오이까지 오밀조밀 심어 주경야독의 모양을 스스로 즐기고자 하였다. 그런데 집 앞을 왕래하는 교통량이 워낙 많다. 무농약 재배이건만 차량의 배기가스와 타이어 분진 등 미세먼지를 옴팡 뒤집어쓰고 자란 가지와 토마토 및 푸성귀를 그냥 먹기에는 영 찝찝하다. 궁리 끝에 환경에 덜 오염될 지중작물로서 고구마를 심으리라 마음먹고 마침 고구마 주산지인 안동을 오갈 참에 싹을 구하여 심었다. 고구마는 그래도 손이 덜 가고 심어 놓기만 하면 저절로 크는 식물이라 신경도 덜 쓰여 좋다. 처음에는 풀과 그런대로 사이좋게 커 가더니 잡초의 생명력이 워낙 강해 장마철만 지나면 하루가 다르게 고구마 잎을 눌러 버린다. 살기 위하여 아스팔트로 가지를 뻗다가 차바퀴에 으스러져버리는 잎은 보기에 참 가여운 모양새라.

전한의 동중서는 삼년동안 휘장을 내리고 열심히 공부를 하여 후원의 채마밭이 망가졌다던데(下帷三年의 고사) 이 몸은 학문 성취도 이룬 것 없이 밭에 풀만 무성하게 만들었다. 이 꼴을 본 집 근처 마트 주인은 컨테이너 놓을 자리로 빌려 달라 하지를 않나, 옆 밭의 할머니는 혀를 차며 이렇게 농사를 지으려면 차라리 자기가 짓겠다지를 않나. 그래도 오가는 사람들이 염려를 하는 것은 고맙다. 분명히 밭 모양새인데도 잡초 우거진 쓰레기장으로 여기는지 음식물 쓰레기와 담배꽁초나 음료수 병들을 당연한 듯이 버리는 것은 볼수록 괘씸하다. 이거야말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 아닌가.

헌데 게으른 풀밭 주인에게 고민이 생겼다. 때가 되었으니 수확을 하긴 해야겠는데 너무 이목이 번다하여 도저히 백주에 캐러 나갈 염치가 없는 거다. 하는 수 없이 어스레한 저녁에 고구마를 캐려니 수확도 별반 없는데다가 흘린 것이 부지기수라 고구마를 담으려 준비한 빈 상자만 아깝다. 다행히 금년에는 고구마 싹을 말려 죽인 것도 별로 없고 처음에 풀도 뽑아준 때문인지 잎이 왕성하여 슬며시 땅 속이 궁금해진다. 얼마나 영글었는지 아내가 시험 삼아 한 줄기 캐보더니 고구마가 실하고 색이 엄청 곱다며 희색이 만면이다. 금년에도 수확 시기를 놓쳐 서리가 내리고도 며칠 지난 다음에야 늦고구마를 캐러 나갔다. 남의 눈치도 안 보고 새벽부터 출반주하여 풀도 치우고 잎을 거두고 캐는데 힘은 작년보다 더 들지만 수확하는 맛이 쏠쏠하다. 갓 캐어 발갛게 색 좋은 고구마를 밭에 주욱 늘어놓으니 마음이 풍요롭다. 그때 지나던 차 한 대가 멈추더니 '아줌마! 그 고구마 팔지 않을래요·'란다. 할마시에게 아줌마라 불렀겠다, 고구마를 팔라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한 말이겠거니 여겨 아내는 들은 척도 안 한다. 이 고구마는 팔 것이 아니라고 대신 대답하고는 둘이서 배꼽을 쥐었다. 넘치게 수확하는 이 기쁨이여!

아내가 외출하며 서너 고랑 남은 것을 마저 캐라 하여 혼자 캐는데 지나는 노인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고 간다. 강아지를 끌고 가던 아저씨는 고구마 맛나게 생겼다고 칭찬을 하더니 막걸리 안주로 하나 달란다. 참! 벼룩의 간을 빼 먹지 생각하면서도 하나 건네고 다시 캐는데 골의 반이 텅 비었고 먹다 반쯤 남은 고구마만 듬성듬성 있다. 아마 들쥐나 두더지의 짓일 텐데 안동의 학봉선생 종갓집에서는 수확 시 작물을 약간 남겨놓아 어려운 사람들이 이삭으로 주울 수 있게 했다는 일이 생각난다. 아무튼 나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배려에 참여하였고, 예상보다 많이 거두어 사람과 들쥐에게 나누어 주기도 한 수확이 아닌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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