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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중

전 단양교육장·소설가

차탁 아래 놓아두었던 책을 끌어당깁니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 그 두 번째 책입니다. '바람 부는 길에서'라는 부제가 붙었습니다. 접어두었던 곳을 찾아 펼칩니다.

'정처 없는 여행자, 목동, 뜨내기 노동자, 나룻배 사공, 혹은 숲과 초원을 누비는 밀렵꾼…. 이들이 마냥 땅의 지표만을 보고 걷는 것일까? 나는 이들이 냄새와 추억, 소망, 주변에서 보내오는 경계의 신호, 초자연적인 것들과의 공감, 공기, 개 짓는 소리, 느지막이 얼굴을 내민 달,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는 바로 그 순간에 그들만을 위해 살포시 피어나는 꽃들, 이 모든 것들이 걸어오는 말에 귀를 기울인다고 믿는다. 길은 내게 용기와 자부심을 준다. 어떤 것의 구속도 받지 않는 건강한 육체 때문이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어떤 스포츠나 육체 단련을 위한 어떤 훈련도,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영혼 깊은 곳의 한 부분을 다시 볼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어지는 내용 모두가 조금 어렵고 딱딱합니다. 수상(隨想)인 듯도 싶고 에세이인 듯도 싶습니다. 철학서처럼도 느껴집니다. 책을 읽다 잠시 생각을 놓으면 방금 읽은 부분의 내용이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금 앞으로 돌아가 되짚어 읽으며 새겨야 합니다. 인생 자체가 복잡 미묘한 길이다보니 당연한 가르침이겠지요. 얼핏 읽으면 딱딱하고 지루한 문장인데 한 문장 한 문장 새겨 읽다보면 잔잔하고 은은하게 인간의 길을 짚어나갑니다. 여성이어서 그럴까요. 길을 바라보는 눈길이 섬세하고 차분합니다.

'인생의 길을 가는 동안에도 아주 익숙하고, 빤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것들이 갑자기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는 걸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평소에는 둔하고 게으르고 움직이는 이미지로만 보였던 것이 눈부시게 생동적인 자태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상치 못했던 우리의 미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다행히도 이런 미래는 아무 뿌리도 없이 그냥 불쑥 튀어나오는 게 아니다. 단지 그동안 모습을 숨기고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을 뿐이다. 이렇게 나타난 미래는 난처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툴툴거리는 법이 없다. 자신이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먼저 길을 지나온 과거라는 친구를 헐뜯고 부인할 필요도 없다. 미래는 내가 성큼성큼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절구절이 옳은 말입니다. 그래, 인생의 길을 가다 보면 그동안 모습을 숨기고 있던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오기 마련이지.

피에르 쌍소의 책은 2001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구입한 지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마음 가는 부분에 밑줄을 그으며 읽었던 책입니다. 당시에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했는데 세월이 한참 흐른 이쯤에서 다시금 읽으니 새삼스럽습니다.

그녀의 길은 계속 이어집니다. 이번에는 기찻길입니다.

'기찻길은 철로 만들어진 길이라는 멋스러운 이름을 지닐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기찻길의 기원이라는 것이 우리의 친근한 길들을 때로 진창으로 만들기도 하고, 때로 메마르게 만들기도 하는 하늘의 변덕스런 기분에 휘말리지 않겠다는 철과 같이 단단한 인간의 의지 안에서 비롯했기 때문이다. 나는 철도 중에서도 대륙적인 느낌을 주는 웅장한 철도들을 더욱 사랑한다.'

이번에 그녀는 기차를 타고 여행하면서 느낀 것들을 잔잔하게 묘사합니다. 기차 옆을 스치는 주변의 건물들, 기차 안과 밖의 광경들, 과거의 기억들, 기차와 관련해 들은 이야기를 적절히 소환하며 글을 이어갑니다. 인생도 그런 것이겠지요. 주변의 인물들, 인생 안팎의 잔잔한 사건들, 업(業)으로 나타난 과거의 잘못이 적절히 엮이며 세월을, 나이를 먹어가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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