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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준

역사칼럼니스트

프랑스는 세계 최초 금속활자본인 '직지'를 50년만에 공개했다. 직지는 고려 말 청주 흥덕사에서 찍은 불서로 독일 구텐베르크 활자보다 80여 년이나 앞선다. 프랑스에 있으나 사실 한국의 우수한 역사문화 위상을 세계에 알려주는 문화 사절이 아닌가 싶다.

40년 전 성역 흥덕사를 찾은 것은 지금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당시 서원학회 회원들은 고인이 되신 강릉대학교 교수 이원근 박사를 중심으로 일요일이면 청주 근교 절터를 답사하는 것이 중요 일과였다.

청주 청원군 일대의 절터는 모두 답사했다. 덕분에 방치된 중요 유물과 유적을 찾기도 했다. 그러나 흥덕사라고 찍한 와편이나 증거물은 찾지 못했다.

청주 운천동 택지개발현장에서 포크레인에 찍힌 '금구(禁口.청동 북)'가 청주시에 신고 됐다. 북 모서리에 '흥덕사 금구'라는 명문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흥덕사의 위치가 운천동 절터로 확인 된 순간이었다.

이 금구를 발견한 이는 이 일대에서 고물을 수거해온 시민이었다고 한다. 그가 택지 공사장에서 팽개쳐진 유물을 청주시에 신고함으로서 그토록 갈망했던 흥덕사를 찾은 것이다. 그 후 고물상으로 흘러갈 위기에서 구한 시민은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정말 표창을 받아야 할 자랑스러운 시민이다.

흥덕사터가 찾아진 이후 청주시는 이를 개발 소재로 삼아 여러 사업을 기획하고 펼치고 있다. 국제공예비엔날레가 가장 대표적인 행사이며 음악회, 오페라 등도 공연한다. 그런데 가장 선행했어야 한 출판단지를 유치하지 못했다. 한국의 대표적인 출판단지는 지금 경기도 파주시에 있다.

청주시 의회가 몇 년 전에 뒤늦게 파주출판단지를 견학하기도 했지만 지지부진한 모양이다. 대전시가 최근 발 빠르게 출판단지 조성 타당성조사를 추진 중이라는 소식이다.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발명했지만 이를 산업에 접목시키지 못했다. 미국의 모 대학에서는 우수한 기술을 발명했으면서 이를 응용하지 못한 실패의 예로 한국을 들고 있다고 한다.

왜 우리는 이토록 훌륭한 두뇌와 기술을 창안했으면서도 뒤쳐진 것일까.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은 사실 조선시대 초기에 이어져 가장 활발한 출판 사업에 응용되기도 했다.

불경이나 성리서 혹은 각종 관공서의 제도 서식 등을 찍었지만 전 국민에게 혜택이 주어지지 못했다. 책은 사대부나 선비들의 전유물이 되었으며 난해한 불경은 사암에서 학승들에게만 필요한 지식이었다.

세종임금이 한글을 창제 한 이후 조선은 일대 도약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아마 한문보다 한글을 익히는 것을 국가적 모토로 삼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한문화에 침잠 된 사대부 지식인들은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우리글을 언문이라고 비하하고 사용하지 않았다. 학문을 하는 선비들은 한글을 쓰는 것을 수치로 알았다. 비록 엄청난 저항과 반대가 있었겠지만 세종, 세조 두 임금이 일대 혁신하여 어명으로 한글을 사용케 했어야 했다.

한글이 제대로 국가에서 공식 국어로 사용하게 된 것은 400여 년 후 대한제국이 출범한 19세기 후반에서 이루어 졌다. 이 시기에도 우리글은 언문이라고 외면당했다. 조선은 근대화에 뒤져 주변 강국의 밥이 되었으며 결국 나라를 잃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다.

지금 이 시대에도 혹 금속활자 발명 같은 역사를 반추하고 있지는 않는지. 과학자, 두뇌들을 존중하고 이들이 마음껏 이상을 펼칠 수 있는 국가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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