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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학창 시절 일이다. 대문 앞 우편함엔 흰 봉투가 늘 놓여있었다. 그 봉투 속엔 육필로 정성껏 쓴 편지가 들어있었다. 먼발치서 훔쳐 본 필자의 모습을 묘사한 내용이 주류를 이뤘다. 누군가 놓고 간 편지 속엔, '아침엔 책가방을 왼쪽 손에 들고 오른쪽 손에 든 암기장을 읽으며 걸을 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한 모습조차 아름답다'라는 내용도 있었다. 필자의 일거수 일투족을 누군가가 숨어서 엿본다는 생각에 왠지 당시엔 심한 불쾌감 및 두려움이 앞섰다. 보낸 이도 없는 정체불명의 편지를 나중엔 개봉도 안한 채 쓰레기통에 집어 던지곤 하였다. 여고 2학년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그토록 일 년 넘게 수많은 편지를 우리 집 우편함에 두고 갔던 그 사내아이가 드디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를 마치고 교문을 나설 즈음 어디선가 갑자기 그 애가 불쑥 앞에 나타났다. 훤칠한 키에 여드름이 듬성듬성 난 얼핏 봐도 옆모습이 귀티가 났다. 필자를 보자 그 남학생은 아무런 말도 없이 한권의 책을 건네주고 시야에서 총총히 사라졌다.

얼떨결에 책을 받은 후 그 아이를 불러 세우려 했지만 갑자기 목소리가 목구멍에 걸려서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 한 후 집에 돌아와 자세히 살펴봤다. 그 책은 다름 아닌 시집이었다. 그 속엔 김광균의 '설야(雪夜)', 유치환의 '깃발', 윤동주의 '서시', 오장환의 '병든 서울', 조지훈의 '승무' 등 주옥같은 시가 빼곡히 인쇄 돼 있었다. 이 시집을 받고 유독 김광균의 '설야' 라는 시에 푹 빠지고 말았다.

'어느 먼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취인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에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하략)… ' 당시 한창 순정적 사춘기에 이르렀던 나이어서인가. 순연했던 감성은 이 시의 시어 한 자 한 자를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온 가슴으로 흡인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 시집에 수록된 시들에 홀딱 반하여 시간 만 나면 책장이 닳도록 암송을 했었다. 그 후 학교를 졸업하고 손에서 시집을 놓아버렸다. 어디 이뿐이랴. 그날 이 한권의 시집을 필자에게 남겨놓고 한마디 말도 없이 눈앞에서 멀어져간 그 남학생의 뒷모습도 점차 기억 속에서 지워졌다.

며칠 전 일이다. 집안을 정리하다가 책 한권을 발견했다. 너무도 반가워 가슴에 끌어안았다. 책을 펼치자 수 십 년이라는 세월 속에 책장은 좀이 슬었고 쿰쿰한 곰팡이 냄새마저 풍겼다. 비록 종이는 낡았지만 활자마다 미세하게 번져 나간 잉크 자국들을 바라보노라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시집을 대하자 학창시절, 한 남학생의 필자를 향한 애틋한 짝사랑이 아직도 그 책 속 장장마다 오롯이 녹아 있는 듯하여 시집을 가만히 얼굴에 대어 보았다.

이 때 문득 종이는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다는 어느 글이 떠올랐다. 이 시집을 대하자 그 말에 더욱 공감이 인다. 종이는 감촉, 소리, 냄새를 그 얇디얇은 품속에 품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서다. 이 책만 하여도 지난 세월을 뛰어넘을 수 있도록 옛 추억을 종이 면면마다 고스란히 봉하고 있잖은가. 아직도 그 남학생이 남긴 체온과 당시 절절했던 마음이 시집을 통하여 다시금 가슴으로 전이되는 듯하여 순간 행복한 마음이었다.

오죽하면 일본 수필 문학의 효시, 마쿠라노소사는 쪽빛 종이를 '고상한 것들의 목록'에 올려놨을까. 그는 심지어 종이 내음을 새 연인의 피부 향기, 글자의 검은 색을 여인의 윤기 나는 머릿결이라고 찬양하였을까. 솔직히 지난날엔 지폐 세는 소리를 가장 듣기 좋은 소리로 손꼽았다. 요즘엔 그 소리보다 이 시집의 책장 넘길 때 나는 '사그락' 거리는 종이 소리에 매료 되곤 한다. 이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책 속에서 향긋한 향기가 피어오르는 듯하여 자신도 모르게 코를 벌름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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