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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회색빛 터널에 오롯이 갇혀 온 기분이다. 지난 겨울 혹한은 별반 없었으나, 문지방을 넘어오는 시퍼런 겨울 추위보다 더 냉혹한 현실이 우리 앞에 가로 놓여있었다. 물론 훈풍이 불어오는 이즈막에도 이것은 좀체 수그러들 줄 모르긴 매한가지다. 2년 여 우리의 생명과 삶을 옥죄어 오는 지긋지긋한 코로나19가 그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기세를 꺾을 줄 모르는 코로나19이다. 이것이 안겨주는 두려움의 암울함과 달리 극채색을 이루는 계절이 돌아왔다. 어느 사이 찾아온 봄빛은, 화사하고 따뜻한 온기로 온 세상을 채색 중이다. 매화와 산수유에 이어 목련도 꽃잎이 벙글었다. 봄꽃이 앞 다퉈 피어나니 왠지 처녀처럼 마음이 설렌다. 해마다 찾아오는 봄이련만 유독 올봄은 더욱 그렇다. 나이 탓이런가. 지난 날 빛바랜 추억이 다시금 화려한 색상의 도돌이표가 되어주기도 한다. 사실 추억도 때론 그것이 지닌 농도에 따라 가슴을 점령하는 순도純度가 다르기도 하다.

봄이 오면 젊은 날 벚꽃 나무 아래를 함께 거닐었던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그네들도 나처럼 어디선가 벚꽃이 필적마다 함께 공유했던 추억에 한번쯤 잠길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해마다 돌아오는 봄이련만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지난 추억을 회상하기도 하고 괜스레 마음이 싱숭생숭 해지는 것은 어인일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반복적인 경험과 행동 패턴이 우리 뇌에 각인 되어서이다. 인지 과학 분야에선 이런 인간 뇌의 패턴을 '스키마(schema)와 스크립트(script)라고 설명 한다.

스키마는 경험을 통해 뇌가 조직화한 지식의 틀에 근거를 둔 새로운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랄까. 봄철만 돌아오면 마음이 설레고 들뜨는 것은 예전에 피어나는 꽃들을 감상하며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아름답던 추억이 스키마로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에 의하면 스크립트 개념은 어느 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행동의 순서를 의미하기도 하잖은가.

어제 일이다. 호숫가를 산책하노라니 장화를 신고 뜰망을 든 남자와 큰 비닐봉지를 든 남자둘이서 호수에서 무엇인가를 건져서 비닐봉지에 담는다. 필경 이는 호수 속 물고기를 몰래 잡는 일이라고 여겼다. 쓴 소릴 해야겠다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실은 호수에서 낚시 및 물고기 잡는 일을 금하고 있어서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호숫가에 버려진 스치로품, 플라스틱 병 등의 쓰레기 수거를 하는 중이었다. 그럼에도 '뜰망- 대형 비닐 봉투- 장화'를 먼발치서 보는 순간 물고기 잡는 행위로 오판하고 말았다. 이는 어느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일어나는 도식화된 행동 패턴에 의한 판단에 의해서였다.

그러고 보니 삶을 사며 스키마를 비롯 스크립트 기억이 작용하는 일이 어디 이뿐이랴. 가장 추운 날 수능 시험을 치룬 경험이 있기에 수능 시험 날짜만 발표 되면 시험장 입구부터 추위에 발목을 잡혔던 지난 기억에 요즘도 온몸이 움츠러든다. 봄철만 돌아오면 어린 날 봄 소풍을 떠나며 소풍지를 향해 먼 길을 걸어갈 때 기억도 새삼스럽다. 그 때 산속에서 들려오던 청아한 새들의 우짖음 소리는 어린 마음에도 무척 경쾌하고 신선하게 들려왔다. 요즘도 아파트 정원수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면 어린 날의 추억이 새롭다.

이밖에도 삶을 살며 정형화된 특정 사건 및 통상적으로 진행되는 여러 일들을 무수히 경험해서인가. 때론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기도 한다. 향후 새 정부에서 펼쳐질 정책만 해도 그렇다. 지난날 정치에 대한 실망에서 비롯된 '스키마'기억 때문인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기대에 어긋나는 상황에 의한 허탈감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음 하는 바람이 드는 이즈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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