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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소설 '빛의 제국'이 인상 깊다. 이 소설은 다름 아닌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언술인 "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머잖아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잠언적 시구에서 착상을 얻은 소설로 기억한다. 이 말은 어찌 보면 인간이 강한 의지를 잃으면 운명에 끌려 다녀야 한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이랴.

소설 속 주인공 김기영은 북한에서 남파된 고정 간첩이다. 하지만 북측으로부터 10여 년 동안 아무런 지령도 받지 못했다. 이에 자신이 고정 간첩이란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이런 부조리한 상황적 소설 설정이 더욱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듯하다. 소설 속 주인공 김기영은 지난 80년대 남한에 남파됐다. 한국 사회의 급변하는 세태를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정신없이 흡인한다. 이렇게 자신의 본분을 잃고 맥 놓고 살던 그는 폴 발레리 언명처럼 살게 된다. 즉 '생각대로 살지 않고 사는 대로 생각하는' 소위 386 세대의 중산층 가장이 된 것이다.

이 소설에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생각한 대로 살기'다. 실은 이 말 대로 살기 힘든 세상이 이즈막 아닌가. 누구나 삶의 변화나 도전 앞에 전과 달리 머뭇거려지잖은가. 코로나19가 창궐하기 전인 불과 일년 여 전만 해도 꿈은 소박하면서 나름대로 지대했다. 얼마 전 집 근처에 건축물을 지을만한 땅을 구입했다. 그곳에 필자의 이름 석 자를 넣은 문학관 한 채 짓는 게 평생 소원이었다. 이 땅을 어렵사리 구입하면서 그 꿈을 이루고자 했다.

이런 꿈 역시 그동안 글을 써 오면서 숱하게 생각해 온 계획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요즘에 와선 이 뜻을 수정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코로나 19로 모든 이들이 힘겹게 살잖은가. 꼭 번듯하게 문학관을 지어서 필명을 자손 대대 남기는 일이 필요할까 해서다. 이게 아니어도 나의 글 한 편이 시대의 조류에 편승해 어둠을 물리치고 독자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준다면 이로써 만족 아닐까 싶다.

이 나이에 무슨 일이든 꿈꾸고 도전 하는 것도 실은 헛된 욕심이란 생각이다. 그동안 손아귀에 움켜쥐었던 것들을 하나, 둘 손바닥을 펼쳐 내려놓고 싶다. 어느 인연으로부터 상처를 받고난 후 더욱 이 생각은 견고해졌다고나 할까.

우연히 어느 여인을 알게 됐다. 사소한 인연도 소중히 여겼기에 어느 날 갑자기 내게 찾아온 인연에 가슴이 설렜다. 하지만 새로운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만은 않다. 실은 인연도 나이 들면 무거운 짐으로 작용한다는 진리를 깨우친 것이다. 그녀는 나를 만날 때마다 자신에 대한 삶의 고통을 호소해 왔다. 딱한 처지에 놓인 그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가 삶의 애환을 토로할 때마다 연민을 느꼈다.

어느 날 급전이 필요하다고 해 얼마간 금액을 그녀 통장에 입금했다. 며칠 후 그녀는 아무런 소식도 전해오지 않았다. 핸드폰 번호도 바꾸었고 살던 집도 이사를 했다. 갑자기 가슴이 텅 빈 느낌이 들었다. 그녀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는 분노보다 돈 때문에 그녀를 잃었다는 안타까움이 앞섰다.

이런 일을 겪게 된 것도 실은 내 안을 깊이 응시해 보는 일에 게을렀던 탓일지도 모른다. 평소 이타심에 젖어서 지냈다면 지나칠까? 누군가가 어려움을 하소연 해오면 별 의심 없이 선뜻 도움을 주는 신중치 못한 면이 그것이다. 다정도 병이런가. 타인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못하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어려운 부탁을 해오면 마치 내 일처럼 걸핏하면 소매를 걷는다. 이로보아 '마음이 현실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마음을 바꿈으로써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의 언술이 진정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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