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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

사람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다. 전자제품들도 시간이 흐르면 낡아 본연의 제 상태를 잃는다. 최근 냉장고에서 갑자기 물이 흘렀다. 급기야는 기능이 멈추고 말았다. 청소기도 먼지를 빨아들이던 흡인력이 매우 헐거워졌다.

이렇듯 가전제품들이 10여 년 사용하면 부품들이 하나 둘 이상 반응을 일으키기 마련인가보다. 이런 제품의 특성을 노린 탓일까? 아니면 상업적 발상인가. 눈만 뜨면 신제품이 출시되곤 한다. 새로운 디자인 및 성능을 추가한 가전제품들을 접하고 싶은 유혹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오래된 전자 기기들을 선뜻 버리지 못하였다. 고장이 날 때마다 AS를 신청해 비싼 부품 비를 지불하면서까지 고집스레 헌 물품들을 사용했다. 이는 지난날 집안 살림들을 한, 두 가지 씩 장만할 때마다 누렸던 소소한 기쁨을 잊을 수 없어서다. 결혼 할 때 혼수였던 반자동 세탁기를 버릴 때는 왠지 서운했다. 이는 아마도 평소 물건에 정을 붙여서인가 보다.

혼수를 떠올리노라니 문득 신혼 시절이 생각난다. 젊은 날 부모님의 극구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을 했다. 결혼 후 손바닥만 한 단칸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이런 형국이니 자연 당시 텔레비전은 사과 궤짝에 보자기를 씌우고 올려놨다. 비좁은 방에 가재도구를 들여놓는다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 시절엔 왠지 행복했다. 청춘이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하면 된다' 라는 자신감이 넘쳐서다. 집주인과 부엌을 함께 쓰며 끼니 때마다 연탄아궁이를 사용하는 불편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다. 머잖아 내 집을 꼭 장만 할 거라는 확신에 의해서였다. 지난날 문틈으로 새어든 연탄가스에 중독돼 몇 번씩 병원에 실려 갔으나 독한 일산화탄소마저도 그 꿈을 무너뜨리진 못했다. 궁핍함에 발목이 잡힐 때마다 학창시절 감명 깊게 읽은 존 스타인벡의 단편 소설, '통조림 공장가(工場街)' 내용을 떠올리며 서러운 자위를 하였다고나 할까.

이 소설 내용은 주인공들이 겪는 적빈(赤貧)을 오롯이 표현하고 있다. 당시 형편에 비추어볼 때 이 소설은 '과연 행복의 실체는 무엇인가?'라는 고뇌를 충분히 안겨주고도 남을 만 한 했다. 이 소설 속엔 온 가족이 수도 공사용 토관(土管) 속에 사는 모습이 그려졌다. 이곳에 사는 삶은 상상만 해도 음습하고 어둡다. 어둠은 절망이고 고통을 의미하기도 한다. 음습함은 쾌적함, 아늑함과는 거리가 먼 낱말이다. 습하여 햇빛 한 줌 안 들어오고 바람 한 점 환기할 수 없는 환경의 삶 아닌가. 생각만 하여도 온몸이 눅눅하고 탁한 공기에 숨이 막히는 느낌이다.

소설 속 아내는 헝겊 쪼가리를 주워 그곳 속 벽에 커튼을 만들어 친다. 토관에 창문이 어디 있으랴. 존재하지도 않는 창의 커튼, 이 내용에서 아내의 절박한 심정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토관 속을 하루 빨리 벗어나 따스한 햇빛을 쬘 수 있는 안락한 집을 갈망하는 게 그것일 것이다. 아내는 토관 속 벽 없는 창문을 마음으로 내면서 그곳에 희망의 커튼을 만들어 쳤을지도 모른다. 꿈은 이렇듯 어떤 고난도 극복하게 하는 강한 힘을 품고 있다. 지난 2년 여 시간 코로나19 바이러스와 사투를 벌이며 그 끈을 놓치지 않았다. 머잖아 코로나19가 종식되고 곧 평화롭고 건강한 삶을 되찾을 거라는 염원을 해왔다.

토관 속 벽 없는 창에 만들어 친 커튼 아래서 헤진 양말을 꿰매며 자신과 등을 맞대고 앉아있는 아들과 함께 손닿지 않는 행복을 꿈꾸는 소설 속 여인처럼 말이다. 필자도 2022년도에는 절실한 꿈 자락에 소망의 창을 내보련다. 그리곤 그 창엔 올해에는 코로나19 바이러스로부터 자유로울 희구(希求)의 커튼도 칠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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