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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비

시인·한천초등학교병설유 교사

샤르트르는 '인간에게 주어진 본질은 없다. 인간은 세상에 그냥 내던져져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자신을 형성해 가는 존재라 했다. 그러므로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다.'라고 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한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 달라진다. 그러나 세상과 인간이 부딪혔을 때 과연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어제는 서울에 가서 문우들을 만났다. 모임에서는 며칠 전 받은 위급재난 문자가 화두였다. 5월 31일 새벽에 서울특별시가 자체적으로 서울 지역에 경계경보를 발령했다고 한다. 사이렌 소리가 들렸고 대피를 준비하라는 내용의 위급재난 문자를 전송받았는데, 대피 사유와 대피 장소를 누락한 채 "대피할 준비를 하라"는 내용만 달랑 보내왔다는 것이다. 북의 인공위성 발사를 전쟁이라도 난 것으로 오인했고, 그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두려움에 떨었다는 것이다.

문우들은 하나같이 무기력한 지식인과 부조리한 사회에 대해 토로했다.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극한의 상황에서 과연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있는가에 의심을 품게 된다. 거대한 시대의 조류 앞에 우리는 그저 파도에 휩쓸려 이리저리 떠도는 작은 해초 조각에 불과한 것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인간의 존엄성은 과연 얼마나 지켜질 수 있는지 생각에 잠긴다. 우리는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지만 활자로 접했던 전후 문학의 참상에 대해 한참을 토론했다.

집으로 돌아와 전후 실존주의 문학을 뒤적인다. 오상원의 <요한 시집> 장용학의 <흥남 철수> 김동리의<유예> 이범선의 <오발탄> 등이 책꽂이에 나란히 꽂혀 있다. 가물가물한 스토리를 더듬으며 흥남 철수를 펼친다. 소설은 1950년 실제로 있었던 흥남 철수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담고 있다. 대단한 전쟁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물들이 전시에 겪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 낸다. 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한 장면이 나오지 않아서 다소 밋밋한 느낌이 들었지만, 전쟁의 아픔과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엿볼 수 있다.

북진하던 유엔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철수를 시작한다. 박철 일행은 종군 문화단 소속의 문화예술인이다. 수복 지구의 동포들에 대한 계몽, 선전, 그리고 위안 임무를 맡은 세 사람은 북으로 가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흥남으로 복귀한다. 이들은 '위안의 밤'에 윤시정이라는 소녀의 '봉선화' 독창에 감동하고 윤시정의 집으로 숙소를 옮긴다. 거기에는 시정, 아버지 윤 노인, 언니 수정 등 세 식구가 살고 있다. 그러나 수정은 간질을 앓고 있어 방문 밖 출입을 하지 않는다. 방이 부족한 탓에 박철 일행은 자신들의 방을 새로운 손님에게 내어주고 주인집인 시정의 가족과 한방에서 자게 된다. 그러던 중 박철 일행 세 사람은 동북 전선에서 유엔군이 철수한다는 사실을 알고 서울로 돌아갈 수 있는 원산의 차편을 구한다. 그러나 간곡하게 부탁하는 정인수와 그의 어머니, 부인, 딸을 보며 자기 표를 양보하고 박철은 시정의 집으로 돌아온다. 함흥과 흥남이 동북 전선 후퇴의 전략 거점이 되고 피난선에 타기 위해, 강 대위 도움으로 시정, 수정을 군인 가족으로 등록한다. 한편 사라졌던 윤 노인이 갑자기 등장하는데, 그는 인민군에 징집된 아들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다 같이 부둣가로 걸어가는 중 수정의 발작이 시작된다. 간신히 박철이 수정을 부축해 승선한다. 그러나 봇짐을 들고 힘겹게 걸어가던 윤 노인이 바다에 빠져버리고 시정이 윤 노인을 부르며 달려가는 사이 피난선이 출발해 버린다. 소설은 인간사의 애잔한 모습을 통해서 그려 내는 역사의 단면이라는 생각을 하며, 밤새 다른 작품들도 모조리 다시 읽는다.

한국의 전후 실존주의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며, 허무감이 밀려들었고 우울의 그림자가 나를 뒤덮었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과연 주체적인 선택을 하며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있을까. 자신이 없다. 비록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 같은 평화를 딛고 서 있지만 이 순간에 감사한다.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이 선조들의 피와 뼈 위에 세워진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 늘 겸손하게 살며 작은 미물도 존엄하게 대해야 하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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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기업 돋보기 5.장부식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

[충북일보]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있다. 국내 시장에 '콜라겐'이라는 이름 조차 생소하던 시절 장부식(60) 씨엔에이바이오텍㈜ 대표는 콜라겐에 푹 빠져버렸다. 장 대표가 처음 콜라겐을 접하게 된 건 첫 직장이었던 경기화학의 신사업 파견을 통해서였다. 국내에 생소한 사업분야였던 만큼 일본의 선진기업에 방문하게 된 장 대표는 콜라겐 제조과정을 보고 '푹 빠져버렸다'고 이야기한다. 화학공학을 전공한 그에게 해당 분야의 첨단 기술이자 생명공학이 접목된 콜라겐 기술은 어릴 때부터 꿈꿔왔던 분야였다. 회사에 기술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일주일에 5건 이상 작성할 정도로 열정을 불태웠던 장 대표는 "당시 선진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일본 기업으로 선진 견학을 갔다. 정작 기술 유출을 우려해 공장 견학만 하루에 한 번 시켜주고 일본어로만 이야기하니 잘 알아듣기도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공장 견학 때 눈으로 감각적인 치수로 재고 기억해 화장실에 앉아서 그 기억을 다시 복기했다"며 "나갈 때 짐 검사로 뺏길까봐 원문을 모두 쪼개서 가져왔다"고 회상했다. 어렵게 가져온 만큼 성과는 성공적이었다. 견학 다녀온 지 2~3개월만에 기존 한 달 생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