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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형? 오랜만이야. 나 '권은'이야…있잖아. 무량사"

처음에는 '권은'이라고 밝혔어도 누군지 쉽사리 알아차리지 못해 적이 당황했지만, '무량사'라는 말이 난수표의 첫 실마리처럼 머리를 스치면서 희미했던 기억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리고 있었다.

약 15년 전, 개인적인 일로 '무량사'란 절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당시 그곳에는 주지스님 한 분과 허드렛일을 하는 박처사, 그리고 2명의 공양보살이 있었다. 주로 손님이 머무는 요사채에는 들쑥날쑥하긴 해도 3~5명 정도가 늘 머물렀다. 보통은 고시공부를 하러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따금씩 세상에서 빚을 지고, 몰래 숨어든 사람도 있었다.

여러 사람이 생활하던 '무량사'에 특이한 사람은 단연 박처사였다. 생긴 모습으로만 보면, 영락없이 돌아가신 법정스님과 닮았었다. 하지만 근엄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그의 정신연령은 초등학교 저학년 수준의 지적 장애인이었다. 그가 절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여름이면 나무 그늘 밑에서 늘어지게 낮잠을 자거나, 간간히 큰 스님을 도와 밭일을 하곤 했었다. 겨울이면 각 방마다 군불을 넣었고, 산속에 흩어진 잔솔가지를 걷어오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평상시에는 무뚝뚝한 성격이라 주변 사람들과 말을 섞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유독 '통조림 햄'을 가진 사람 앞에서는 비굴한 미소까지 지으며 살갑게 대하곤 했다.

4월 초파일이 되면, 조용하던 사찰은 작은 축제와 같았다. 그날만큼은 절이 온통 외지 손님으로 붐벼 떠들썩했는데 박처사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노란 테두리의 장난감 선글라스를 끼고는 군중들 사이를 신나게 누비고 다녔다. 우스꽝스런 그의 모습이 몇 년째 반복되자, 마치 초파일이면 '무량사'에서 의도적으로 연출한 퍼포먼스처럼 되어 버렸다.

그로부터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7월의 중순 즈음, 큰 스님이 박처사를 찾고 있었다. 아침부터 도통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녀석, 어디 보이기만 해봐라. 정신이 번쩍 들게 혼내줘야지"

좀처럼 화를 낼 줄 모르던 큰 스님이었지만, 그날따라 유달리 잔뜩 인상이 구겨져 있었다. 각자 자신의 볼일을 보던 객식구들도 은근히 걱정도 되었고, 조금은 무료하던 참이어서 모두 슬슬 방을 나와서는 박처사를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한참을 수색하던 중 어디선가 박처사를 찾았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큰 스님의 예측대로 감나무 그늘에서 한창 달디 단 낮잠에 빠져있는 것을 누군가가 찾아낸 것이다. 큰 스님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녀석, 도대체 너는 뭣 하는 놈이냐. 그렇게 할 일 없이 매일 낮잠만 자려거든, 당장 이 절에서 나가버려!"

그러자 잠에서 막 깨어나 몽롱한 눈을 비비던 박처사는 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더니 느릿한 말투로 큰 스님에게 말했다.

"네가 나가"

아무도 예상 못했던 박처사의 엉뚱한 답에 모두들 폭소가 터졌고, 큰 스님은 자리를 뜨면서 혼자 중얼거렸다.

"허, 부처가 따로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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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