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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깨끗한 물속에 송사리 떼가 노닐고 있다. 손가락으로 살짝 터치하니 맑은 물소리와 함께 수풀 속으로 얼른 숨어버린다. 거실에서 개울물을 한 손에 들고 흔들며 물고기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닐 수 있으니 염천(炎天)의 피서가 따로 없는 듯하다. 뿐이랴. 스크린에 손가락을 살짝 대기만 해도 책장은 술술 넘어간다. 손가락과 책장에 침을 묻혀 가며 독서하는 행위의 수고로움도 덜 수 있다.

얼마 전 친지가 구입한 아이패드 속 세상이야기다. 간편하게 쥘 수 있는 얇고 작은 패널 속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세계가 액자화 되어 담겨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또래의 친척 아이들은 서로 아이패드를 차지하려 애가 탔다. 그러나 한 시간도 채 못 되어 아이들은 아이패드를 거실 소파에 던져 놓고 마당의 진돗개와 놀러 나갔다.

디지털은 결국 아날로그의 모방이다. 편리와 효율성으로 무장한 최신 첨단기기에는 어떻게 해서든 우리의 자연과 실재하는 현상을 최대한 압축하여 재현해 보려는 분투의 노력이 담겨 있다. 하지만 피와 살을 가진 유기체로서의 인간에게 아날로그적 삶은 숙명이며 또한 행복이다. 아무리 편리하고 신이(新異)롭다 해도 스크린에 갇힌 평면화된 삶은 인간의 입체적 신체가 느낄 수 있는 온몸의 미세한 감각을 충족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아이패드 속의 송사리를 손가락터치로 수만 번 움직이게 할 수 있어도, 단 한 번만이라도 아이의 모아 쥔 손바닥 안에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건져 올릴 수는 없을 것이다. 뿐인가. 아이들끼리 모여 언제 개울물에 가자는 약속, 등 뒤에 느껴지는 따가운 햇살과 들큰한 물비린내, 힘을 합쳐 물고기를 몰아가는 협응력 등 관계맺음의 과정과 주변 환경과의 조화로움이 기기(機器)에는 생략되어 있다.

내게는 60년대 출판된 박종화 역(譯) <삼국지>가 있다. 빛바랜 책장의 이 세로쓰기 <삼국지>가 그 어떤 책보다 소중한 건 조부가 물려주신 유산이기 때문이다. 아직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예닐곱 살의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운율에 몸을 실어 읽어 주시던 관우, 장비 이야기를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워 듣던 장면은 그 자체만으로 내 아이에게 들려주는 또 하나의 이야기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는 그때의 등잔불빛이 배어있는 듯하고 침을 묻혀 넘기시던 책갈피마다에는 그야말로 조부의 체취가 그대로 살아 있다. 때로 접힌 자국의 책장을 보면 이 부분에서 특별히 할아버지께 감흥이 있었던 구절이 있었는지 다시 한 번 내용을 꼼꼼히 새기게 된다.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오래된 책을 통해 소통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내 아이에게 나는 가끔 할아버지의 삼국지를 보여주곤 한다. 이렇게 종이책에는 낡아가며 오히려 새로워지는 역사가 있다. 그로인해 또 하나의 이야기가 생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e-북(book)에는 읽기의 편리성은 있을지 모르나 그 독서 행위로 인하여 빚어지는 '인간의 이야기'는 기대하기 어렵다. 아이패드가 구현하려 애쓰는 멀티스크린 속 세상을 보며, 실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에서 인간관계의 조화로움, 자연과 현상의 생기(生氣)가 얼마나 경이롭고 아름다운 신비인가를 새삼 역설적으로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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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