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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춤추는 북 카페'는 책을 기부 받고 판매하는 장애인들의 사업장이다. 모처럼 그곳에서 커피를 마시고 좋아하는 책 한 권을 샀다. 김영하의 산문집 '랄랄라 하우스'다. 평범한 일상을 작가 특유의 재치로 그려내는 재미가 쏠쏠했다. 창가에서 책장을 넘기다 '툭'하고 종이 한 장이 책갈피에서 튀어 나왔다. 누군가 적어놓은 낙서가 적힌 메모였다.

'사랑은 택시와 같다. 사랑은 택시다. 버스는 기다리면 오지만 택시는 자기가 반드시 잡아야 한다. 비가 오거나 날씨가 궂은 날엔 더 기다려지고 내릴 때는 반드시 탄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하고 그 타고 온 시간이 길면 길수록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합승은 불법이다.'

누가 쓴 글인지 몰랐지만, 그 의미가 가슴에 닿았다. 미지의 누군가 적어 놓은 쪽지 하나에 훈풍(薰風)이 몰려왔다.

대학시절 도서관은 자리 쟁탈전이 치열했다. 새벽부터 줄을 서서 자리를 잡아 놓으면 온종일 자리를 점유할 수 있었다. 영역을 소중히 여기는 동물의 습성이 잠재해 있었는지 사람들도 늘 앉던 자리를 고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자신의 자리를 고집하다보니 시간이 흐르면서 대충 근방의 학생들은 서로 얼굴이 익게 마련이다. 내 뒷자리에는 하나의 식물처럼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여학생이 있었다. 두꺼운 안경을 쓴 그저 평범한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강의시간이면 정신없이 책을 챙겨서 가고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무언가를 열심히 베끼기도 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녀의 책갈피에서 떨어진 작은 쪽지 하나가 내 마음을 흔들었다.

'내일이 무엇이랴. 저녁노을이 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 오늘 최선을 다하였다면 그뿐. 또한 내일이 무엇이랴. 밤늦은 도서관에 걸린 별을 보며 나 오늘 온 마음을 다하였다면 행복하였네.'

오랜 세월이 흘러 정확하게 기억할 수는 없지만, 대충 그러한 내용이었다. 단 한마디의 대화도 없었지만 그 문장 속에 그녀의 성실하고도 의연한 삶의 모습을 읽어내면서 그녀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그녀의 안경은 더욱 이지적으로 보였고, 아무렇게나 묶어 흩어져 내린 머리도 지저분해보이지 않고 오히려 순수한 결정체처럼 여겨졌다. 한동안 그녀의 모든 몸짓과 표정이 남달랐던 기억이 새롭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 속에서 우연히 낙서 하나를 발견한 후, 겪게 되는 특이한 경험을 그린 소설 카롤린 봉그랑의 '밑줄 긋는 남자'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우였다. 우리들의 지난 시절에는 서로 책을 빌려 주고 보는 것이 흔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밑줄 그어 놓은 문장을 발견하게 되고 그 문장을 나도 공감할 때 가슴 벅참을 느끼기도 한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에 대한 일종의 유대감이랄까. 거기다 간단히 적어놓은 메모마저도 마음에 쏙쏙 와 닿았다면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카페에서 산 책 한권에 깃들어 있던 '사랑은 택시와 같다'라는 쪽지는, 지난 시절 도서관에서 흘린 여대생의 의연한 삶이 담긴 글귀로 이어주고, '밑줄 긋는 남자'에서 얼굴 없는 남자와 주인공 콩스탕스의 자유분방한 사랑까지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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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