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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윤

前 산소마을 편집장

어린 시절 방 한 쪽에 늘 콩나물시루가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밤중 잠결에도 할머니가 시루에 물을 끼얹고 밑으로 냇물처럼 졸졸 물이 흘러내리는 소리가 머리맡을 적시곤 했지요. 할머니는 나에게도 수시로 물 줄 것을 당부하셨어요. 그래야만 잔털이 생기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린 마음에 물은 밑으로 늘 빠져버리는데 그냥 물에 담가놓지 않고 왜 힘들게 물주는 일을 반복해야 하는가라는 의구심이 있었지요.

"이 녀석아, 그냥 물에 담그면 썩어버려. 뭐 하나 키우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니?"

할머니의 이 말씀이 떠오르는 것은 정말 뭔가를 키운다는 것은 정성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지요.

엊그제 작은 아이 입안이 구내염이 생겼습니다. 그 때문에 밥도 잘 못 먹고 양치질도 못하는 것입니다. 약국에서 '알보칠'이라는 약을 사와 입안에 발라주려 하니 싫다며 고개를 흔듭니다. 전에 저도 그 약을 발랐을 때 둔중한 통증과 함께 마취되는 느낌이 옵니다. 그러나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환부가 줄어드는 느낌과 함께 상처의 회복이 신기할 정도로 빠르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아이는 약을 들고 있는 저를 피해 내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멀찌감치 달아나 완강하게 거부했습니다. 아이는 그 동통(疼痛)을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었어요. 본인이 잘 때 바르라는 것이었습니다. 빨리 낳게 하려는 아빠의 마음을 모르는 녀석에게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억지로라도 두 팔을 붙들고 약을 바르려 했지만, 아이는 격렬하게 저항하며 손을 뿌리쳤어요. 그리고는 제 방으로 달아나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혼자 허탈하게 앉아 생각해보니 막내여서 아기 같이만 생각하고 어렸을 때 약 먹이던 기억처럼 너무 강제적으로 아이를 제압하려 했구나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부모로서 좋다고 판단되는 것이면 아이의 의사와 관계없이 실력행사를 해도 된다는 안일한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제 부모의 잣대를 거둬들이고 아이의 눈높이로 대화를 이어가야 한다는 생각이 새삼 가슴을 쳤습니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본인이 경험하고 수긍할 때까지 기다리는 여유가 필요했지요.

그날 밤 진정이 된 아이와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예전에 온 가족이 남이섬 갔을 때로 돌아가고 싶어. 토끼도 잡고, 별도 보며 정말 좋았거든. 그때로 돌아가게 되어서 내 수명이 단축된다 해도 그 순간에서 그대로 멈춰있고 싶어."

순간, 가슴이 싸하게 아려왔습니다. 정규 학교시간과 방과 후 수업 그리고 학원까지, 시험기간에는 밤 11시를 넘겨 오는 날도 허다했습니다. 힘들다고 푸념하면 "미래를 위해 무조건 오늘을 참아야 된다."라고 억눌렀지요. 아이들에게도 오늘 하루, 이 순간이 소중한 삶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살았던 것입니다. 삶에서 그냥 흘러 보내도 좋은, 무의미한 시절은 없는 것이니까요. 설령 지금 당장 물이 다 새어버리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시루에 풍성하게 꽉 차오르는 콩나물처럼, 아이에게 부모는 꾸준히 인내하며 사랑의 물을 부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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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