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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10.16 14:13:27
  • 최종수정2024.10.16 14:13:26

이상준

전 음성교육장·수필가

청주시 서원구의 모충동(慕忠洞)은 본래 청주군(淸州郡) 남주내면(南州內面)에 속해 있던 지역이다. 조선 영조 때 남주내면 빙고리(氷庫里), 1789년 빙고리, 이현리(梨峴里), 1896년 화청리, 화동리라 했는데 1914년 일제(日帝)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월교리(越橋里), 화청리(華淸里), 화동리(華東里), 수곡리(秀谷里), 보십리(甫十里) 일부 및 서주내면(西州內面)의 화여리(華與里)를 병합하여 화여리(華與里)라 하여 사주면(四州面)에 속하였다. 여기에서 화여리를 화흥리(華興里)라 표기가 된 곳이 있는데 아마도 '與와 興'의 한자가 유사하여 오기한 것으로 짐작된다. 1935년 청주읍에 편입하였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을 폐지할 때 이곳에 있는 모충사(慕忠祠)에 근거하여 모충동(慕忠洞)으로 바꾸었다.

모충사는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것이 아니었다. 1894년 10월3일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가 이끄는 관군이 출병하였는데 강외면에서 전멸하였다. 그래서 11월에 청주목사 임택호(任澤鎬)가 남석교 밖에 단을 만들고 장충단이라 하였는데, 1903년 조정에서 모충단(慕忠壇)이라는 단호(壇號)를 내려주어 당산에 단을 다시 세우게 되었다. 1905년 10월에 '모충단 갑오전망장졸기념비(甲午戰亡將卒紀念碑)'를 세우고 1907년에는 당산에 사당을 세웠던 것이다.

1914년 8월에 일제는 모충사라 이름을 바꾸고, 1923년 도지사 박중양(朴重陽)이 당산에 신사를 설치하기 위해 모충사를 화청령 동쪽 기슭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모충동 청송아파트 자리로 추정되며 지금의 모충사는 1975년에 이곳(모충동 산 13-6 /모충로 85)으로 이전 설치하였다고 전해진다. 모충동 411-10에는 1748년에 건립한 작은 목조 건물이 있는데, 주민들은 대체로 '효자문'이라고 부른다. 정식 명칭은 '연최적충효양전문(延最績忠孝兩全門)'으로, 이 비석의 주인공인 연최적(延最績)은 조선 숙종시대 사헌부 감찰을 지낸 분으로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함에 대하여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으로 옥사했는데 갑술환국 이후 신원이 회복되어 효행이 더해지면서 효자문이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모충동의 자연 지명을 보면 개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배티(고개)'라 부르는데, 모충동 쪽에는 곡산 연씨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연배티'라 하고 개신동 쪽은 '박배티'라 불렀다고 한다. 옛날에 이곳에 배나무가 많아서 '배고개, 배티'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유사한 음의 의미로 유추한 것으로 짐작이 되며 다른 지역의 지명에서와 마찬가지로 '크고 높은 고개'의 의미로 본다면 이 고개가 옛날에는 높고 험한 고개였을 것으로 짐작이 된다. 그래서 청주읍성에서 볼 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고개이므로 읍성을 지키거나 공격할 때의 군사적 요지였을 것이다. 따라서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이 이끄는 의병이 이곳에 주둔하여 청주읍성 탈환의 큰 역할을 한 화청령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이다.

효자문 부근에 '고당'이라는 이름이 전해오는데 지형으로 보아 구룡산과 매봉산의 산 줄기가 이곳으로 뻗어 내려온 곳으로서 원래의 이름은 '곶당'일 것이며 이를 한자로 '花'로 표기하다 보니 '華'로 변이되어 화청리(華淸里), 화동리(華東里), 화여리(華與里)의 지명 요소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효자문의 안쪽에 있는 마을은 정문 안쪽이라 하여 정문안말, 또는 안말이라 불렀으며 안말 위쪽은 골짜기가 벼랑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벼랑골'이라 하던 것이 '바람골, 바랑골'이라 불리었다.

빙고리(氷庫里)라는 지명은 고당 마을의 옛 모충사 밑에 있던 골짜기로서 고기 장사하던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으로 서울의 동빙고동과 서빙고동처럼 빙고(氷庫)가 있던 지역이며 주민들은 '핑구골'이라 불렀다. '샘골(샴골)'은 지금의 모충동 그린맨션 자리가 되며 샘이 있던 골짜기였고 서원대학교 북문 안 쪽에는 샘이 쌍으로 있어서 쌍샘골이라 불렀다.

또한 서원대 남문 아래에 있는 마을을 지장골이라 부르는데 이곳에 '지장사'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명의 명명 과정으로 보아 '기장(볏과의 한해살이풀)골'에서 변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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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철 헌정회장 "개헌 방향 '정쟁 해소'에 초점"

[충북일보] 대한민국헌정회(회장 정대철)는 27일 오후 2시 서울 여의도 국회박물관 대강당에서 '정치선진화를 위한 헌법 개정 대토론회'를 개최한다. 헌정회는 지난해 11월부터 헌법개정위원회를 구성해 개헌의 방향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국가 100년 대계 차원의 조문을 만들었다. 이 연구에 이시종 전 충북지사도 참여했다. 정대철 회장은 "정쟁을 해소하는데 개헌의 방향의 초점을 맞췄다"고 설명했다. ◇헌정회가 개헌안 마련에 나서게 된 배경은. "헌정회는 오늘날 국민적 소망인 정치권의 소모적 정쟁 해소와 지방소멸·저출생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 적극 대처하는 것이 시급히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라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헌법에는 이러한 국가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구 유럽처럼 정쟁을 중단시키는 장치인 내각불신임·의회 해산제도 없고, 미국처럼, 정쟁을 중재·조정하는 장치인 국회 상원제도 없다보니, 대통령 임기 5년·국회의원 임기 4년 내내 헌법이 정쟁을 방치 내지 보장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따라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헌법개정이 불가피하다는 결론에서 헌정회가 헌법개정안을 추진하게 되었다." ◇그동안 헌법개정은 여러 차례 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