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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05.25 16:03:06
  • 최종수정2022.05.25 16:03:06

이상준

전 음성교육장·수필가

마을 입구에 나무나 돌을 조각해 세우는 장승은 예로부터 마을의 풍년과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신의 역할을 해 왔으며, 전국 방방곡곡에 설치한 역참에는 오늘날의 고속도로 이정표처럼 동서남북 방향에 있는 마을이나 관청 및 그곳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장승을 세웠다. 그래서 장승배기라는 지명은 삼국시대부터 온 나라의 큰길에 역참을 설치하고 장승을 세웠던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장승과 관련된 지명은 『고려사』나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작은 돌을 쌓은 돌무더기나 나무로 만든 장승이 있던 곳을 의미하는 ‘승산(栍山), 승천(栍川), 승천원(栍川院), 승이(栍伊), 승역(栍驛), 석적(石積), 석적원(石積院) 등으로 기록하였으며, 또는 돌장승의 흔적으로서 ‘입석방(立石坊), 입석부곡(立石部曲), 입석소(立石所), 입석역, 입석원, 입석천’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밖에도 ‘장승배기’를 비롯하여 ‘장성백이, 장승고개, 장승재, 장성골, 장성현, 장성배기, 장성마을, 장승촌, 장승리, 장선이, 장선포(長先浦), 벅수거리, 당거리, 당산마을’ 등이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 후기부터는 ‘승(栍), 장승(長丞,長承,長栍), 장생우(長栍偶), 후(堠), 장성(長性, 長城), 장선주(長先柱), 장선(長先, 長仙)’이라 했으며, 한글로는 ‘댱승, 쟝성, 장신’ 등 다양한 명칭이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특히 최세진(崔世珍)은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 후를 ‘댱승 후’로 새기고 있어 ‘장승’이라는 명칭이 16세기 이후 일반적으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으며, 정조대왕 13년(1789)에 이의봉(李義鳳, 1733∼1801)이 쓴 ‘고금석림’(古今釋林)에는 “댱승은 우리의 것이다. 한어로는 ‘토지노아’(土地老兒)이며 ‘댱승’과 ‘쟝승’은 순수한 우리말(韓語)이다”라고 기록돼 있으며 15세기에 '댱승'이었다가 16세기에 '쟝승'으로 표기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41개의 '큰길(驛道: 역도)'과 524곳의 '역마을(驛村: 역촌)'이 있었으며 장승을 세운 지역을 일컫는 '장승배기'가 전국에 1천500여 곳이 있었다. 그러다 갑오개혁 이듬해인 1895년 역참제도가 폐지되면서 장승도 사라지고 말았다. 장승에는 그 위치와 이웃 마을 이름, 방향과 거리가 자세히 적혀 있었다. 처음에는 흙과 돌로 팻말을 세운 것을 '돈대'(墩臺: 흙이나 돌로 쌓은 단)라고 부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후(堠)’라는 이름을 붙였다. ‘후’를 사전에서 찾으면 ‘이정(里程)을 표시하기 위해 길가에 세운 팻말(돈대) 곧 장승’이라고 나온다. 5리, 또는 10리마다 세운 것은 ‘소후(小堠 ; 작은 장승)’, 30리마다 설치된 역참에 세워진 것은 ‘대후(大堠; 큰 장승)’라고 불렀다.

우리 신화 속의 장승은 산과 토지의 수호신인 산신 및 토지신의 신역(神域)에 속하는 마을의 수호신으로 등장하며 무속이나 민속에서 장승은 동제(洞祭)의 주신(主神) 또는 하위신으로 솟대, 신목(神木), 서낭당, 입석, 돌무더기 등과 함께 신역의 대상이 되어 왔다. 또한 방위신과 축귀 대장군, 길을 수호하는 노신(路神)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관에서 역참에 설치하는 이정표를 장승이라 부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장승이라는 명칭의 혼란은 오히려 일제에 의하여 생기게 되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2년에 조선총독부는 언문철자법을 만들어 '벅수와 장승이 같은 것인데 장승이 표준말'이라고 조작하여 공표했으며 불교의 사찰이 극도로 타락했던 시기에 서민들을 상대로 이자놀이와 사채업(高利貸金)을 하던 '장생고(長生庫, 長生錢, 長生布)', 사찰의 경계를 표시했던 '장생표주(長生標柱: 말뚝)' 등을 장승의 유래라고 강변했다. 왜냐하면 일제의 조선총독부(학무국)가 우리의 토속신앙을 미신으로 폄훼하면서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서낭당과 당산, 벅수, 장승까지도 타파하여 민족 의식을 말살하고, 조선 민족이 삼국시대부터 선진적으로 역참제도를 운영했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완전히 소거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는 아주 교묘한 술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장생'이라는 말은 사찰 소유 토지의 경계 표시로서 세운 장생표탑(長生標塔), 장생표주(長生標柱)에 쓰였으며, 신선 사상의 장생불사(長生不死), 풍수 도참사상에 의한 비보 성격의 장생(長栍) 설치 등 불교나 신선 사상 또는 민속에서 ‘장승, 장생’이라는 용어를 흔히 사용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장생(長生)’과 ‘장승(長栍)’은 각각 다른 기능의 말이었는데 그 음이 유사하여 ‘장생’이라는 이름을 동시다발적으로 빌어 썼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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