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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자

수필가

장독대 위에 가지런히 놓여있는 항아리에 물을 뿌렸다. 흩어지는 물 분자 사이로 무지개가 뜬다. 항아리마다 행주로 문지르며 송홧가루를 닦아내니 검붉은 항아리 본연의 색이 난다. 어머니는 할머니 대를 이어 항아리를 정갈하게 관리하셨다. 3대째 어머니의 항아리를 물려받은 나는 농막에 들릴 때마다 행주로 훔쳐내고 온다. 할머니께서 일본으로 유학 가신 아버지를 위해 늘 정화수를 올려놓고 기도하셨던 곳도 장독대 위에 놓여있던 항아리였다고 했다. 사기로 만든 사발 속에 달이 떴고, 할머니는 달을 보며 위안을 얻었다고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항아리가 비면 물을 채워 지나가는 구름을 담기도 하시고 바람에 업혀 온 단풍잎 배를 띄우기도 하셨다.

몇 년 전, 뉴질랜드로 가족여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서 보았던 낮달이 신비스러워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뉴질랜드는 우리나라와 시차가 고작 3시간이니 적응하기 힘들지는 않았다. 아침은 가볍게 먹는 편이라 근처 퍼그 베이커에 들러 커피와 빵을 주문해서 먹었다. 빙하가 녹아 흐르는 다트 강을 따라 세워진 산봉우리가 신비스러웠다. 우리는 소나무 숲이 우거진 마운트어 스파이어링 국립공원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와 달이 함께 떠 있었다. 그곳에서 들은 가이드의 해설이 인상적이라서 농막 간장 항아리에 담긴 달을 보면 늘 뉴질랜드의 하늘이 생각났다. 가이드는 낮달이 보이는 이유는 하늘의 광도보다 달의 광도가 더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태양 가까운 하늘의 광도는 달의 광도보다 높으므로 여기 달이 있다면 태양 빛을 차단하지 않으면 달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낮달은 신기하게도 하얀빛을 띠었는데 이유는 낮에 태양 빛이 푸른색이 산란하여 푸른색으로 빛나는 색유리와 같은 공기층을 뚫고 달빛이 우리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했다. 달이 공전하면서 생기는 현상이 바로 달의 모양이 달라지는 것이고 초승달에서 반달로 반달에서 보름달로 다시 초승달이 되는 것이 이 공전 때문이라고 설명해 매우 흥미로웠다. 또 달은 밤에는 노란색으로 보이고 밝은 낮에는 태양과 달의 거리가 가까워 잘 보이지 않거나 흰색으로 보인다고 했다. 파이어링 국립공원에서 태양과 함께 떠 있는 낮달 때문에 달에 관한 공부는 많이 했지만, 달에 대한 신비했던 어린 시절이 공기 중에 흩어지는 것처럼 아쉬웠다.

할머니께서 지금까지 살아계시고 함께 여행하면서 낮달을 보셨다면 어떤 표정을 지으셨을까. 할머니는 정화수 사발에 보름달이 뜨면 할머니 소원이 성취되실 거라 믿으셨다. 기도는 마음으로 하는 것이니 몸속 기를 모아 발원할 때 정성이 하늘에 닿아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장독대 위에 있는 항아리를 목욕시키니 소래기 위에 물이 동그랗게 고였다. 밤이었다면 우리 집 항아리 위에 서른 개의 보름달이 뜨고 내 마음속에 달을 품으니 달 풍년이 들었을 게다.

어릴 때 과학이 발달하기 전까지는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다고 생각했었다. 정월 대보름날이 되면 더 가까이 달을 보며 소원을 기도하기 위해 동산으로 올라갔던 적도 있다. 야근하고 퇴근하는 길에 달은 등불이 되어 집으로 안내했고 창문으로 드나드는 달빛에 가슴 설렜던 청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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