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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아지트를 찾아서 - 낙화장 기능보유자 김영조 화가

화(火)를 다스려 화(畵)를 만들어내는 낙화의 묘미

  • 웹출고시간2010.10.11 00:07:08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빨갛게 달궈진 인두의 끝이 한지에 닿으면 한점 한점과 아름다운 선으로 희디 흰 화폭에 유려한 산수가 되고 부처의 미소가 피어오른다.

김영조 화가의 청목화랑

ⓒ 정서영 기자
보은군 보은읍 대야리 속리산 입구 국도변에 '멀리 가는 향기'라는 전원카페 옆 마련된 '청목화랑'에서 지난 1일 충북도로부터 '낙화장(烙畵匠)'을 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받고 기능보유자로 인정고시 받은 김영조(60) 낙화전문 화가를 만났다.

김 화가는 이날도 정성스럽게 숯불로 화로를 피우고 빨갛게 물든 인두 끝에 정성을 모아 한지에 낙화를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낙화는 화(火)를 다스려 화(畵)를 만들어내는 섬세한 표현력이 생명이다.

청목화랑의 전시실, 김영조 화가의 정성이 모아진 작품 30여점이 전시돼 있다

ⓒ 정서영 기자
그의 전시실에 가득 차 있는 작품들을 보면 이것이 정말 인두로 한지에 그려낸 작품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경이로운 감탄사가 절로 나올 수밖에 없다.

낙화는 한지나 나무를 불로 태워 그곳에서 일어나는 자연의 색으로 표현되는 유일한 회화의 세계로 사람들에게 저항감없이 친근감을 느끼게 만들어 먹고 물감으로 만들어내는 산수화와 달리 또 다른 회화로서의 매력에 빠져들게 한다.

김영조 화가가 숯불에 달구어진 인두를 살펴보고 있다. 불의 세기를 차근 차근 가늠해 보는 모습이 삶의 치열함을 관조적으로 보는 듯하다.(왼쪽) '제24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의 모습, 수백만개의 점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원근감이 잘 표현돼 있다.(오른쪽)

ⓒ 정서영 기자
이런 서민적 친밀감을 불러 일으키는 낙화의 질감은 낙화만이 갖고 있는 장점이며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없다.

그가 지난 2007년 '제24회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받은 '신선암 마애보살 반가상'은 1년여동안 인두로 수백만 번 점을 찍어 완성한 작품으로 이 작품에는 단지 기예로서 수학여행지에서 거래되고 예술이라는 이름을 받지 못해왔던 낙화를 전통예술로 승화시킨 40여년 가까운 그의 장인으로서의 낙화 인생이 고스란히 묻어나 있다.

전문적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던 그도 처음에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관광지에서 나무에 인두를 대고 기예로서 낙화를 해왔지만 지난 1975년 보은 속리산에 청목화랑을 만들면서 관광지 기념품정도만 알고 있는 천대받는 기예에서 전통예술로서의 자리매김을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부단한 노력을 해왔다.

그는 우선 전통화법을 되살리기 위해 노력했다.

전통낙화는 재료에 있어서 나무나 가죽보다도 한지나 비단을 재료로 쓰고 앵무부리 인두, 평인두(동정 다릴 때 쓰이는 인두의 작은 것) 전통인두를 사용해 숯불에 달궈 사용한다.

또 여기에 민화나 산수화에서 보여지는 평면적인 맛에서 벗어나 원근감과 입체감을 강조하는 현대적인 질감이 표현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30여 년 동안 낙화를 그려온 그는 차츰 자신의 일이 관광지 기념품 제작이 아니라 하나의 예술장르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게 됐고 그간 작품을 접했던 유명 미대 교수들과 전문가들의 감탄과 격려도 이어졌다.

올해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참가해 입선해 강산모진도 12폭 병풍 (한지)의 모습, 1년여의 시간을 거쳐 완성됐다.

ⓒ 정서영 기자
또 관광차 속리산을 올 때 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 일본 등 외국에서 이어지는 작품주문 등은 그에게 큰 용기가 됐다. 10년전 속리산 자락에 있던 청목화랑을 현재의 위치로 옮긴 이후 낙화에 대한 옛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전국의 박물관을 찾아다니며 선조들의 그림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고 지난 2007년부터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 문을 두드려 이 대전에서 입상을 해왔으며 단청과 민화에 포함돼 있던 낙화가 내년부터는 정식과목으로 독립할 수 있는 성과를 일궈내기도 했다.

조선초기 오세창이 쓴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는 '안동장씨(安東張氏, 1598년생)가 낙화에 능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수산 박창규(遂山 朴昌珪)가 1837년 화화법(火畵法)을 창시했다는 기록이 밀양박씨 족보에 남아있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 등을 거치며 전통미술으로서의 지위가 사라져버린 '낙화장'을 도 무형문화재로 자신은 기능보유자로 이끌어내기 까지 설움과 고난을 이겨낸 낙화쟁이 김영조 화가는 이제 '쟁이'로서의 기능적인 면에서 머물지 않는 '장인'으로서의 '전통의 명맥'을 잇고 '낙화'에 대한 저변을 확대해야 하는 또 다른 숙제를 어깨에 걸고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각오로 더욱 부단한 노력을 할 각오다.

언제나 그랬듯이'청목화랑' 작업실의 숯불이 타오르고 마치 그의 낙화에 대한 열정처럼 인두가 빨갛게 달아오르면 그의 손은 하얀 한지위에서 무릉도원을 그려내고 부처님의 미소를 펼쳐낸다.

보은 / 정서영기자

"낙화 정식 교과목 채택 노력"

청목화랑 작업실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김영조 화백의 모습

낙화장 김영조 화가는 회화에 대한 전문적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40년 가까이 낙화에 몰두하면서 전통예술로서 명맥이 끊어진 낙화를 단순한 '기예'에서 '삶의 혼을 담은 예술'로 승화시켜왔다.

40여년의 낙화 인생의 소중한 결실로 낙화장을 도 무형문화재로 이끌어낸 김 화가는 이번 낙화장의 도 무형문화재 선정에 대해 이제까지는 단지 기능으로서 공예의 일부분으로 여겨졌던 낙화가 한 장르로서 회화로 인정된 것이며 이는 낙화가 수백년만에 다시 제도권으로 진입했다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김 화가는"한 분야에 대한 사랑과 그 기간을 인내하며 꾸준히 자신을 연마해내야 전통의 맛을 살릴 수 있는 작가가 될 수 있다"며 "전통을 확실히 고수하면서 낙화의 끊임없는 발전위해 현대미술과 접목하는 시도 등 지난 세월은 습작으로 생각하고 좀 더 다양한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그는 "낙화는 불을 다루다 보니 숙달하기 까지 오랜 시간 걸기 때문에 낙화를 하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전통낙화 쪽에 관심을 기울이는 정도가 약했고 비인기 예술분야로 제대로 예술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해왔지만 전승공예대전에서 한분야로, 도 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 등 이제 푸르게 자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돼 저변확대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낙화를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로도 신청해 문화재청의 심사를 앞두고 있는 김 화가는 "이제 용기를 갖고 좀 더 열심히 할 이유가 생겼다"며 "낙화를 체계적으로 가르치고 학교등지에서 정식 미술과목으로도 채택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편 좋은 작품을 열심히 준비해 전시회 등을 통해 낙화가 얼마나 아름다운 예술품인가를 보여주고 싶다"고 앞으로의 포부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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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일보가 만난 사람들 - 단양교육지원청 김진수 교육장

[충북일보] 몇 년동안 몰아친 코로나19는 우리 나라 전반에 걸처 많은 염려를 낳았으며 이러한 염려는 특히 어린 아이들에게 실제로 학력의 위기를 가져왔다. 학력의 저하라는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교육을 통해 모범 사례로 손꼽히는 단양지역은 인구 3만여 명의 충북의 동북단 소외지역이지만 코로나19 발 위기 상황에서도 잘 대처해왔고 정성을 다하는 학교 지원으로 만족도도 최상위에 있다. 지난 9월 1일 자로 단양지역의 교육 발전에 솔선수범한 김진수 교육장이 취임하며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고 있다. 취임 한 달을 맞은 김진수 교육장으로부터 교육철학과 추진하고자 하는 사업과 단양교육의 발전 과제에 대해 들어 본다. ◇취임 한 달을 맞았다, 그동안 소감은. "사자성어에 '수도선부(水到船浮)'라는 말이 있다. 주희의 시에 한 구절로 강에 물이 차오르니 큰 배도 가볍게 떠올랐다는 것으로 물이 차오르면 배가 저절로 뜨더라는 말로 아무리 어렵던 일도 조건이 갖춰지면 쉽게 된다는 말로도 풀이할 수 있다. 교육장에 부임해 교육지원청에서 한 달을 지내며 교육장의 자리가 얼마나 막중하고 어려운 자리인가를 느끼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어렵고 바쁜 것이 '아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