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는 기독교와 같은 박해를 받아보지 못했다. 진시황 때 460여 명의 유학자가 매장을 당하고 마오쩌둥에 의해 핍박을 받은 정도이다. 2004년에 중국 공산당은 공자학원 1호점을 강남에 세우고 충북대학교에 2호점을 세워서 중국의 얼굴로 삼았다. 공산주의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공자를 중국 당국이 다시 살린 이유는 기독교를 박해했다가 국교화했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 한국의 불교도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되었기에 백성들이 자유롭게 믿을 수 있었다. 예수를 박해했던 사도 바울은 유대교 전체 역사를 요약할 때 부활 신앙으로 마무리한다. 그는 예수를 전하는 사람이지 예수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정치화된 조직은 사상을 전하지 않고 사람만을 전한다. 석가·공자의 사상도 중요하지 않다. 원효·퇴계의 사상을 정확히 몰라도 된다. 도그마를 비판 없이 신뢰하고 극장의 우상으로 만족한다. 별도의 교양과목을 들어도 그들의 위대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원효는 해골의 물로, 율곡은 십만양병설로, 다산은 수원 화성으로만 기억될 뿐이다. 안식일은 거룩히 지내야 하고, 하느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구약의 하느님은 안식일에 일하는 자를 죽이라고 했다. 모세가 망설이자 직접 지시하여 돌로 죽이게 한다. 빈틈이 없는 절대불변의 가르침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하필이면 이날에 환자를 고치고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다. 랍비를 일부러 혼란하게 하였으나 산상수훈에서와 같은 권위 있는 설교는 없었다. 다윗 왕을 예로 든 변명은 반발심만 키웠다. 이것이 메시아인지 긴가민가하게 여기는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빼앗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운명을 재촉했다. 예수는 안식일의 주인을 하느님에서 사람으로 돌린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1,400년 동안 이어진 안식일의 개념을 바꾸어버렸다. 탈무드의 가장 지혜로운 랍비라 할지라도 예수에게 돌을 던졌을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방법에 대해 어느 누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백성 위에 군림하지 않고 섬기는 자가 가장 높은 자가 될 것이라는 믿음은 오직 예수만이 가지고 있었다. 거룩한 섬김을 위해 스스로 희생양이 된다. 공자에게는 봉건적 사대주의자라는 딱지가 따라다닌다. 공자를 곡해할 때 쓰이는 말이자 정곡을 찌르는 말이다. 지도자를 중심으로 지방이 분권화된 사회를 꿈꾸었고, 위대한 것(大)을 섬기려(事) 하였다. 진시황이나 마오쩌둥을 위대한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다. 공자에게 자로가 임금을 섬기는 것에 대해 물었을 때 속이지 않고 직언을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군(事君)은 물론이고 신하를 부릴 때도 예를 중히 여겨야 하며 자신에게 충성하는 자만이 임금에게도 충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修身과 修學은 자기를 이기고 예로 돌아가기 위한 방편이었고 忠恕가 없는 섬김을 경계하였다. 그러나 정치화된 조직은 공자의 섬김을 왜곡하였고 예수의 섬김은 일회적인 역사적 사건으로만 기억되었다. 공자는 말한다, 위대한 것을 섬기라고. 예수는 말한다, 주인을 섬기라고. 맹자가 말한다, 백성을 다스리는 자가 仁義의 大道를 갖추고 있지 않으면 임금이 아니라 도둑놈이라고. 그래서 임금을 바꾸라고 한다. 짐이 곧 국가인 시대가 있었다. 개발독재 시대에도 대통령이 곧 국가였다. 영화 변호인에서 배우 송강호가 곽도원에게 말한다, 국민이 국가라고. 내 위치로 돌아와서 자문해보았다. 교직원, 학부모, 학생 등 세 주체가 모두 주인이라는 말은 너무나 교과서적이다. 학생을 위한다고 하면서 선택은 어른들이 모두 해주었다. 학교의 주인은 누구인가? 누구를 섬겨야 하는가? 이곳에도 거룩한 섬김이 가능하겠는가?
아무도 수업이 뭔지를 묻지 않았다. 누군가가 물으면 교수-학습 과정이라고 얼버무렸다. 학생과 교사가 한 학기에 담아야 할 마음의 자세를 수업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할 수 없었다. 진도 나가기 바빴고 수행평가를 하는 데에만 힘을 썼다. 좋은 수업에 대해 논의할 기회도 찾아오지 않았다. 많아야 일 년에 한 번이고 작년에는 없었다. 교사는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프로타고라스였다. 수업의 개념에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지향하는 모습이 담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열린 교육 이후로는 교사의 활동이 경시됐다. 교수-학습 과정을 학습-교수 과정이라 바꿔 불렀고, 교사는 가르치지 말고 안내만 하라고 다그쳤다. 교사의 강의는 지식 암기에 효율적이지만 학생의 자율적 탐구를 방해한다고 지적됐다. 강의는 학원강사와 과외교사의 몫이었다. 교사는 학습 모형이 잘 운영되게 하는 도우미에 그쳐야 했다. 학생은 교실 수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자율적으로 탐구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실제로 볼 기회는 적다. 보통은 한 학생이 이끌어가는 대로 나머지 학생이 따라가는 모습이 흔하다. 스스로 독서 하지 않고 부모도 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강의를 들으면서 경험을 넓힐 기회도 사라졌다.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교과서와 참고서뿐이다. 독서와 강의가 사라진 곳에서 학생도 소극적으로 학습을 한다. 학습의 자율성 혹은 주도성은 배움의 출발선에 이미 갖춰진 것이 아니라 달리는 동안에 배워야 하는 위대한 역량이다. 하지만 주도성은 수업의 전제 조건으로 생각하거나 모든 수업이 완료된 다음에 평가 기준으로 갑자기 등장한다. 학습의 주도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주도성이 어떻게 작동되는가? 교사도 주도하지 못하는 교수 활동이 있는데 학생이 학습을 주도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선택형 지필평가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하는 것이 목표인 곳에서는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타는 것이 유일한 목표이다. 배움의 기쁨은 공자님도 말년에서야 터득했다. 수업의 개념에 대해 6년 전부터 '배움 중심 수업', '학생 참여형 수업'이라는 용어가 등장해 교사들을 당황시켰다. '과정 평가'라는 말이 그랬던 것처럼 별종의 수업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연수에 참여했다. 배움이라는 단어를 분석해도, 참여라는 단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도 수업에 변화가 생기지는 않았다. 이젠 그 용어도 유행에 밀려 사라지고 있다. 작년의 온라인 수업은 시공간에 변화를 줬을 뿐이다. 블렌디드 러닝은 방법만을 반복해 설명하고 학생과 교사가 갖춰야 할 마음의 자세를 말하지는 않는다. 수업을 위해 교사는 강의를 준비하고 학생은 독서를 해야 한다. 그들이 자신과 세계에 대해 대화를 통해 탐구하는 것이 수업이다. 교과서는 교실에 있을 필요가 없다. 교과서와 참고서는 수업의 장애물이다. 기본 개념은 온라인에서도 들을 수 있다. 온라인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을 교실에서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교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온라인에서 하겠다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교실 수업에서는 동료의 얼굴을 보거나 교사의 얼굴을 보면서 대화로 탐구하는 활동이 전개돼야 한다. 강의와 독서가 사라진 교실에서 학생의 배움이 자라지는 않는다. 동영상만 보거나 학생 혼자서 문제만 푸는 것은 학생과 교사가 함께 지향하는 활동 모습이 아니다. 독서를 해야 저자와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처럼 교사의 강의를 들어야 교사와 대화를 할 수 있다. 독서할 때는 저자 탓을 하지 않으면서 열정적인 강의에서는 교사 탓만 하는 문화도 버려야 한다. 강의 자체를 문제 삼지 말고 대화로 전개되지 않는 강의 방식을 문제 삼아야 한다. 학생의 독서, 그리고 교과서에 의존하지 않는 교사의 강의가 수업의 시작이다.
"줌(Zoom) 수업은 교실 수업의 모조품이야. 아무리 쌍방향 온라인 수업을 해봤자 표준으로 삼은 교실 수업을 능가할 수 없어. 온라인은 현실의 책상을 모방한 화가의 그림과 같지. 어찌 그림의 책상이 실물의 책상과 같을 수 있나?" 1년 반 동안 방치됐던 '책상'을 6월 14일부터 꺼내기 시작했다. 2019년 봄, 다른 학교 공개수업에 참관했을 때도 쌍방향은 보이지 않았다. 그해 12월까지도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과 학생 사이의 대화적 탐구활동이 교실 수업의 주류도 아니었다. 영리한 교육부는 팬데믹으로 인한 미증유의 유급을 막기 위해 2020년 봄에 수업을 재정의한다. ㉠몸이 교실에 없어도 온라인으로 쌍방향 대화가 가능하다면, ㉡콘텐츠를 교사가 올리고 학생이 내려받는 것을 당일에 할 수 있다면, ㉢교사가 과제를 제시한 후 정해진 시간에 학생이 해결한 것을 교사가 확인할 수 있다면, 이 모두를 수업으로 인정하는 놀라운 선언을 한다. 공이 교사와 학부모에게 넘겨졌다. 교육 당국은 2020년 가을부터 온라인 쌍방향을 권장했다. 인프라 미구축으로 강제 명령을 할 수 없어 속만 끓이고 있을 때, 쌍방향도 교실 수업을 대신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쌍방향을 하라는 학부모의 민원에 맞서, 콘텐츠 제공이나 과제제시형이 더 낫다는 내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사회성과 학력 저하를 우려하는 여론까지 출렁거렸다. 열린 교육 이후 20년 만에 뉴노멀이 생길 징조였다. 학습은 일종의 성장(Growth)이다. 기존의 경험을 재구성해 나가는 탐구활동이다. 대화가 없는 것을 일러 쌍방향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쌍방향으로 대화를 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실제로 대화를 통한 탐구과정이 없다면, 쌍방향 수업은 아니다. 코로나가 있기 전만 해도 대화가 없는 교실 수업은 혁신의 대상이었다. 1년 반 동안 코로나와 과도하게 씨름한 탓일까? 전면등교가 실시되면서 2019년처럼 하는 것에 모두들 편안함을 느낀다. 6월 14일 전면등교가 실시되어 잠깐 혼란을 느꼈다. 교실로 돌아온 학생들은 교사, 칠판, TV만 바라보느라 단짝 외에는 친구들을 관찰할 필요가 없어졌다. 모둠학습의 자율성도 줌에서만큼 보장되지 않았다. 예전처럼 교사도 모둠 관찰을 형식적으로 하거나 부분적으로 했다. 필요에 따라 모둠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았다. 스피커에서는 잘 들려던 목소리도 교실에서는 들리지 않았다. 줌에서는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자신과 상대의 모습을 보았다. 모둠 협력보다는 단짝과의 주도성이 수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교사의 권위는 스피커의 볼륨에서 오지 않고 신뢰감과 설득력에서 왔다. 줌의 소회의실 기능은 다른 모둠에 방해를 하지 않으면서 그룹 대화를 보장했다. 공동활동을 직접 할 수는 없어도 공동의 아이디어를 편리하게 모았다. 전체를 통제하면서도 개별화 지도를 즉각적으로 할 수 있었다. 방과후에도 학생들은 자기들끼리 줌에서 협의를 했다. 학습의 주도성은 수업 시간 내의 훈련 과정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방과후 생활과 연결돼야 한다는 것을 줌이 일깨워주었다. 그들의 자유로운 협의를 방해한 것은, 학력 신장을 도와준다는 학원의 대면 강의뿐이었다. 지난날에 Zoom 앞에서 당황했던 것은 정체된 수업 개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경험을 성찰하지 않은 자들도 2022 교육과정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 G7에 참가한 한국경제, 외교, 군사는 2019년보다 성장했다. 교육계만 뒤로 갈 수는 없다. 구호로만 미래를 외친 채 쓰던 책상을 다시 사용한다면, 십 년간 쌓은 혁신의 탑을 그 흔한 돌담으로 여기는 것이다. 미래에서 디자인된 책상은 지금도 나에게 묻는다. "수업이 뭐냐고!"
먼저 말할 사람이 따로 있다. 그는 현재 KBS 음식 다큐멘터리, 한국인의 밥상을 이끌고 있다. 22년간 방영된 최장수 드라마 전원일기의 김 회장이었고, 허무개그 시리즈의 주인공이었던 최불암이었으며, 차인표와 송승헌의 아버지로 나왔던 드라마에서는 건달이었다. 무엇보다도 살인의 추억 속에 삽입된 수사반장의 주인공이었다. 그는 18년 동안 사랑받는 국민배우 박 반장이었다. 80세가 넘은 박 반장은 아직도 건강하다. 하지만 반장과 함께 범인을 잡던 세 명의 형사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세 명 중 막내였던 故 조경환 배우는 현재의 마동석 배우와 같은 이미지였다. 71년에 시작한 드라마 수사반장에서 10년 동안 조 형사로 있다가 1981년 3월 신군부 등장과 함께 인기몰이를 한 청소년 드라마, 호랑이 선생님에서는 5학년 담임 허봉수 선생님 역을 맡았다. 많은 국민들이 저녁엔 수사반장을, 평일에는 호랑이 선생님이라는 드라마를 칼라 TV로 동시에 볼 수 있었다. 형사가 교사가 되었으니 호랑이 선생님이라 할 만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내 머릿속의 장면은 단 하나이다. 장군을 아버지로 둔 학생이 등장한다. 그 학생은 대대장도 위엄있는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도 아버지의 부하일 뿐이다. 대위와 대령이 별 앞에서 경례를 올리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별인 줄 알았다. 자신의 담임 허 선생도 그 흔한 장교 정도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허 선생이 장군의 아들 집으로 가정방문을 한다. 장군도 집에 있었다. 교실에서 대장군처럼 행동하는 허 선생이 자기 아버지 앞에서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볼 줄 알았다. 장군과 호랑이가 처음 눈빛이 마주하는 순간 모든 시청자들도 허 선생이 종이호랑이로 변하는 모습을 기대하고 있었다. 현관에 들어온 호랑이를 누가 마중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방에 세 명이 서 있는 장면에서 장군은 담임을 상석에 앉히더니 갑자기 무릎을 꿇고 앉았다. 호랑이가 당황하기 전에 장군의 아들이 먼저 당황한다. 호랑이가 별 앞에서 벌벌 떠는 그림이 재현되지 않아서 혼란에 빠진다. 장군과 호랑이의 대화에 섞인 웃음이 거실까지 흘렀다. 장군의 아들은 내내 말을 하지 않았고 고개만을 숙이고 있었다. 국민에게 헬기 사격을 명령하고 정신을 통제하기 위해 언론을 통폐합했던 세력이 '정의 사회를 구현하기 위해' 이런 장면을 기획했거나 연출을 허락했을 것이라고 추측도 해본다. 퇴임이 멀게 느껴지지 않는 순간에 이 장면만이 지워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나에게도 물어본다. 여전히 자기 자식만이 잘되기를 바라는 모습을 감추지 못하는 부모가 주위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인가? 부모가 자식 앞에서 그런 것처럼, 교사는 사회적 지위와 무관하게 학생 앞에서 배움의 권위로 다가선다. 양육권과 교권이 충돌하지 않은 채 한 인격 속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져야 미래가 밝아진다. 장군은 아들의 평소 모습을 보면서 배움의 권위마저 존중하지 않을까봐 걱정했을 것이다. 배움을 향한 자식의 자세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를 소망했기에 자신보다 나이가 많지 않은 담임에게 무릎까지 꿇었다. 5월은 교육의 계절이다. 소중하게 자라야 할 어린이는 어버이를 섬김으로써 타인을 배려하는 마음의 씨앗을 품고, 스승을 공경함으로써 타인 존중의 열매를 맺는다. 호랑이에게 장군은 민원인이 아니라 동반자였다. 학생 성장은 부모와 교사 존재만이 아니라 그 관계에서도 영향을 받는다. 멀지 않아 우리 아이들이 학부모가 되면, 분명히 교사들의 동반자가 될 것이다. 5월은 참 멋진 계절이다. 아파트와 학교 담장에는 붉은 장미가 달려있고, 어른의 가슴에는 카네이션이 달려있다. 아이들 가슴에는 희망을 달아주어야 한다.
4월 20일, 카메라 앞에 선 유은혜 장관이 현재의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배경과 추진 방향이 담긴 원고를 읽어나갔다. 유 장관이 낭독한 문장들은 다수의 국민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다.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쁜 학부모라면 분명 바꾸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며 일단 수긍을 하더라도, 변화되는 교육 향방에는 혼란을 느끼게 된다. 연설 영상을 몇 번이나 뒤로 돌려보는 현직 교사도 왜 또 바꾸는지 의문을 갖게 된다. IMF시절 6차 교육과정이 완전히 도입되었고 이제까지 여섯 번의 교육과정 변화를 겪었다. 5, 6년마다 바뀐 셈이다. 우리 동네 보도블럭보다 더 자주 갈았다. 보도블럭은 느닷없이 갈아치워지고 그냥 그대로 있어도 불편함이 없지만, 교육과정을 제때 바꾸지 않으면 한국 사회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유 장관의 목소리에도 깔려 있다. 5.16쿠데타 정부도 그랬다. 1954년 제1차 교육과정이 만들어진 이후 거의 10년 만에 2차 교육과정을 개정하면서, 60년 뒤 미래에도 미친 듯이 회자될 명언을 한다. 그 내용을 그대로 옮겨본다. "교육과정은 운영에 있어서도 단편적인 지식 주입에 편중한 나머지 인격의 도야에 소홀하였고, 학습 활동도 표방하는 경험주의와는 멀리 실생활과의 유리가 심하여 교육 개혁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았다." 교육과정의 철학은 빈곤해도 제시된 비전은 강렬했다. 전두환은 '정의 사회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자주적이고 창의적인 국민'을 목표로 삼았다.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목표이다. 문민정부는 '21세기 세계화 정보화 시대를 주도할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한국인'을 꿈꾸었다. 그 비전을 선포하던 해에 불행하게도 IMF사태가 터졌다. 경제성장보다 학력성장에 자신 있었던 이명박 정부는 '배려와 나눔을 실천하는 창의적인 인재'를 설계했다. 4년간 치러진 일제고사 때문에 63년 쿠데타 정부도 비웃을 만한 업적을 쌓았다. 현재의 교육과정을 디자인한 박근혜 정부는 '바른 인성을 갖춘 창의 융합형 인재'를 제시했다. 문과와 이과는 여전히 갈라져 있고 국제 및 국내 문제는 해결의 숨통이 막혀 버렸다. 유 장관이 낭독한 지향점은 '미래역량을 갖춘 자기주도적 혁신 인재'이다. 정치적 성향이 다름에도 교육의 방향은 다르지 않았다. 2022년 이후에도 여전히 학교와 학원은 지식 주입에 집중하느라 교육기본법에 나와 있는 인격도야는 소홀히 할 것이고 실생활과 유리된 학습활동을 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게 될 것이다. 60년 동안 그런 비판을 받아왔고 앞으로도 그런 비판을 하면서 데자뷰를 느낄 것이다. 미래 시대를 대비하는 만큼 철학도 있어야 한다. 지난달 여당의 의원들이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에서 민주시민으로 바꾸려는 소동이 있던 터에 이번에도 민주시민교육은 다시 강조되었다. 교총은 민주시민교육을 통하여 여당과 정부가 특정 정파와 단체의 주장에 접근하는 경향이 있다고 의심한다. 전교조는 민주시민교육을 더욱 전면에 내세우자고 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민주시민교육이 문서로만 이루어지고 있고 교사회-학부모회-학생회의 조직은 자율적이지 못한 상황인데 어쩌라는 말인지 모르겠다. 홍익인간의 이념은 교육과정의 출발점이다. 지속 가능한 미래 사회를 위해 기후 생태, 디지털 소양은 언급하면서 빈부격차를 야기하는 경쟁 문제는 언급하지도 않는다. 빈부격차는 경쟁뿐만 아니라 공정성을 강조하는 사회의 불가피한 산물이 되어 버렸다. 불확실한 미래 사회에서 각자도생을 위한 미래역량을 갖추는 것이 학교 교육이라면, 교육과정에 대해 희망을 말한 사람은 오직 유은혜 장관만이다. 환웅의 홍익인간을 학생들 마음에 담으려는 교육과정은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들자식 키워봤자 다 소용없어!" 커피를 마시는 옆 테이블에서 들려왔다. 30대 중반의 총각 셋이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면서 지금까지의 '죄'와 앞으로의 '죄'에 대해 서로 면죄부를 주고 있었다. 아들을 둔 부모들은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두 시간 동안 들고 있던 머그잔을 놓은 후 수학 공부를 마친 작은아들을 데리고 집 앞 미용실로 갔다. 뒷머리를 미용사에게 맡기며 카페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듣자마자 크게 웃더니 자신의 8남매 이야기를 꺼낸다. 충북 오창 과학단지가 개발되면서 홀어머니가 10억 이상의 보상비를 받았고 세 오빠에게만 전 재산을 물려주었다고 한다. 큰오빠 집에 들를 때마다 눈칫밥을 먹고 있는 구순 어미의 측은한 모습을 보기 힘들어 요양원으로 모셨다고 한다. 그 비용은 딸들이 부담하고 있다. 올케들을 한껏 같이 씹어주고 나서 눈을 뜨고 거울을 보니 작은아들은 자고 있었다. 서구 계몽주의 시대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이성의 한계를 탐구하던 독일인이 있었다. 공리(功利)만으로는 인간이 행복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무조건적 이성의 명령에 자율적으로 따르는 방법만이 인간답게 사는 길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루소의 에밀에만 파묻혀 자신의 사상을 실현할 교육 방법을 찾지는 못했다. 인도인들이 윤회를 전제로 윤리적 삶을 정당화하듯이, 실천 이성의 무조건적인 법칙을 익히기 위해 영혼의 불멸만을 요청할 뿐이었다. 어릴 적부터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합리적으로 토론을 한다고 하여 타인을 배려하고 天命을 내면화하는 것은 아니다. 단군왕검과 동시대에 살았던 순임금은 孝만이 대동사회를 이룩하는 원천으로 보았다. 그 사회에서는 자기 부모만을 부모로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다. 1800년이 지나 공맹이 이것을 다시 강조하자 묵자는 차별적이고 허례허식이라며 비판하였다. 그러한 비판은 지금도 존재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풍류(風流)를 말한 최치원의 말이 옳다면, 홍익인간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분명히 孝를 출발점으로 삼았을 것이다. 묵자나 쾨니히스베르크 독일인은 가족애에 갇힌 이기심만을 보느라 조건 없는 부모 섬김이 타인에 대한 배려로 전이되는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孝는 농경사회에서 사회보장제의 기능을 하였다. 내리사랑에 대한 기억만큼만 의무적으로 봉양하려 한 것도 사실이다. 자식에 대한 자애가 무조건적이었듯이, 내리사랑에 대한 자식의 기억과는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행위가 바로 孝이다. 자식으로부터 봉양을 받으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조건 없는 배려를 체득하도록 의식적으로 孝를 가르쳤다. 가수 박상철이 노래한 것처럼 타인에 대한 배려는 무조건이어야 한다. 무조건의 개념이 없는 불효자는 확실히 어질지 못하다.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려는 부모들은 인간답게 살라는 간절한 마음을 孝에 담았다. 3월 말이면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가 학부모 상담주간이다. 교권 못지않게 부모의 권위도 추락하고 있다. 부모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있어야 교권이 살아난다. 상담주간을 통해 자식의 멘토로 담임을 초빙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담임의 교육방식이 자신의 소신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자식의 성장을 바란다면, 비난을 뒤로 미루고 신뢰부터 쌓는 것이 좋겠다. 오디세우스의 아들 텔레마코스는 엄마 품에서 용기와 지혜를 갖춘 효자로 자랐으나 왕국의 위기를 맞아 결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토로이로 떠나기 전 오디세우스의 부탁을 받은 그의 친구 멘토(Mentor)가 찾아온다. 사부일체가 되어 서로 정직하게 소통한다면, 아테나 여신이 멘토로 변신을 하여 텔레마코스를 가르쳤듯 교사도 신적인 멘토가 될지도 모른다.
"제는 아직도 보리를 먹네!" 점심에 도시락 뚜껑을 열면 몇 년 묵은 정부미 사이에 낀 보리쌀이 얼굴을 내민다. 반찬통에 담긴 김치보다 그 보리밥을 통해 집 사정이 드러나는 것이 창피했다. 개천에서 태어났으니 용이라도 되면 좋으련만 물려받은 기억력도 내세울 것 없었다. 성실한 노력만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전부였다. 돈도 많고 머리가 좋은 놈은 과외까지 하면서 공부하지만, 그런저런 머리로 혼자 공부해야만 하는 사람에게 공부를 즐겁게 한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과 같았다. 가난하다는 것 못지않게 머리가 나쁘다는 것도 창피한 노릇이다. 시험 당일이면 전날까지 얼마나 공부를 하지 않았는지를 서로 자랑했다. 시험 결과가 동일할 경우 더 적게 공부한 사람이 더 똑똑한 놈이 된다. 새벽을 넘겼어도 자정 전에 잠을 잤다고 말했다. 가난한 놈이라는 소리는 참을 수 있어도 미련한 놈이라 불리고 싶지는 않았다. 가난이 싫었고 물려받은 머리도 너무 평범하여 남들보다 배 이상으로 노력해야 했다는 사실이 자랑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용이 된 후에는 학원이나 과외 교사의 도움을 받았더라도 일부러 밝히지 않은 채 개천을 자랑하게 된다. "가난한 환경 속에서 문제집 한 권 살 수 없었고 배운 것을 저절로 암기할 정도로 똑똑하지는 않았지만, 잠자는 시간을 줄였으며 학교 수업에 충실하고 예습과 복습을 철저히 하였습니다." 오로지 나의 수고 덕분이어야 한다. 할아버지의 재력이나 엄마의 정보력, 무관심한 아빠의 유전자가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공립과 사립의 시스템의 차이가 엄존해도 교사의 가르침은 전국이 평준화되었으니 오로지 나의 성실한 노력만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다고 믿어야 한다. 공정에 대하여 최신작을 낸 마이클 샌델도 이 점을 지적한다. "하버드 대학생들은 자신들의 뛰어난 재능과 유복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자신은 노력과 수고 덕분에 하버드에 입학했다고 입을 모은다." 천하게 여겼던 개천 생활을 자랑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은 용이 된 직후일 뿐이다. 용이 되고 나서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재산, 재능과 미모 등은 노력과 상관없이 모두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운 좋게 귀한 것을 물려받아도 감사하지 않는다. 운이 없는 사람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지도 않는다. 행운을 갚아야 할 빚이나 의무라 생각하지 않는다. 최소의 노력으로 성공한 이후에는 태만에 빠진다. 세대를 달리하여 계급 사회와 집안이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것은 가진 자의 의무감 때문이다. 그리스 반도로 이주한 도리아인이나 인더스강으로 이주한 아리안족은 토착민을 노예로 삼고 계급 사회를 영속화했으나 향락을 즐기는 집단이 아니었다. 스파르타 귀족은 전사가 되기까지 고통스런 훈련을 감당해야 했다. 카스트 최고의 브라만도 신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고행을 감내해야 했다. 말목을 자른 손으로 아들 원술의 목까지 자르려고 한 화랑의 기개가 있었기에 삼국을 통일 할 수 있었다. 물려받은 것을 빚으로 여기지 않는 자는, 타인을 지배하고 학대하려 한다. 최근 배구계의 스타 자매가 SNS를 통해 피해자 코스프레를 하다가 진짜 피해자로부터 폭로를 당하여 출전정지를 당했다. 부모의 우월한 신체 유전자를 물려받았고 미색까지 겸하여 연봉과 인기가 치솟던 자매였으나 그들의 행동을 제어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안하무인이 되어 재능이 부족한 동료를 업신여겼다. 아이돌 배구 스타 모녀에게는 대표로서의 특권만 있었고 신라 화랑의 마음씨가 없었다. 운이 좋아 생긴 특권을 유지하려면 책임감이 요구된다. 학교부터 국가에 이르기까지 책임을 갖고 일하지 않는 자들은 특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온라인 종업식이 끝나고 카톡이 날아왔다. "선생님, 1년 동안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5학년 처음 됐을 때 심었던 종자가 벌써 나무가 되고 열매가 열린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ㅎㅎ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열매의 씨도 다시 따서 심어야 하듯이 6학년 때도 열매에서 나온 씨앗을 심어 또 다른 나무를 키워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말 감사했어요!!!" '교육 종묘회사'가 새로운 종자를 개발했다. 7년 전에 취임한 CEO는 '다(多)행복'의 종자를 폐기처분하고 '혁신'의 종자에 '미래학력'을 교배시켜 5년간 육성했었다. 이번에 내놓은 것은 코로나 이후에도 반듯하게 성장하도록 주도성과 디지털 시민성이 추가된 '미래' 종자이다. 학교는 블렌디드 러닝 수업을 통해 디지털 리터러시가 구현되게 2월부터 파종을 해야 한다. 미래 종자에 담긴, 사람중심 미래교육의 비전은 2015교육과정에 담긴 비전보다 더 진보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당시에는 4차 산업혁명과 온라인 수업에 대한 아이디어가 없다.'고 말하는 전문가들이 등장하면서 5년 사이에 역량의 개념이 수정된 것처럼 호들갑을 떤다.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프로젝트 수업이 미래교육의 전형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은, 그것이 이미 20년 전 열린교육에서 강조한 수업이라는 것을 모르는 척 하고 있다. 하기야 비전은 슬로건과 구별되지 않는다. 새 비전을 담으라고 말하면 새 용어만을 제시하였고, 비전을 공유하라고 말하면 제시된 단어를 가다듬는 데만 신경을 썼다. 과거 몸담았던 혁신학교에서 워크숍을 할 때도 그랬고 여러 학교가 모여 연수할 때도 그랬다. 최근에도 비전을 공모하겠다는 공문이 내려와서 씁쓸한 웃음을 짓게 했다. 슬로건은 발아되어 성장한 모습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 이름으로 백년대계를 꿈꿀 수 없다. 발아되지 않는 슬로건은 자랑할 만한 역사와 문화를 만들지 못한다. 매년 슬로건만 바꾸는 학교가 백년이 된 후에도 자랑할 수 있는 것은 졸업생 수와 교장이 몇 대인지 뿐이다. 교육계는 유달리 미래와 행복을 강조한다. 多행복이라는 구호로 일한 사람이 행복씨앗의 이름으로 일하고 있으며 현재의 교육비전도 결국은 '행복'이다. 각 학교도 행복과 미래라는 그릇 속에만 교육의 내용을 담으려고 한다. 미래를 열거나 행복을 꿈꾼다는 의미가 들어가면, 일단 슬로건으로는 합격이다. CEO들이 바뀔 때마다 수정된 구호 속에 비전이 얼마나 녹아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어찌 패러다임이 매년 바뀔 수가 있겠는가! 종묘 회사의 포럼을 두 번 보고 다른 회사의 것도 들었다. 새 용어와 미사여구가 너무 많아서 불편했고 오직 미래에만 관심을 가져서 허전했다. 5대 전략 외에 4대 과제가 별도로 있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다. 5대 교육시책에 있던 공감능력은 보이지도 않는다. '지역교육 생태계'만이 두 번 강조되고 있었다. 20년 전의 종자와 비교하여 현재의 종자에 다른 차원의 비전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사용하는 기술이 달라진다고 하여 교육의 본질이 쉽게 변하지는 않는다고 믿는다. 그 옛날 회사에서 파견된 감독관은 효율적인 판서 활용과 교단 위 동선의 전형을 제시하였다. 이어 OHP 활용을 문제 삼던 시대가 있었고, ICT기기 활용을 못하면 무능하다고 지적한 시대가 엊그제였다. 이젠 지혜로운 스승일지라도 ZOOM 활용이 부족하여 블렌디드 러닝 수업이 미숙하면 명퇴를 선택하는 분위기다. 용어를 아무리 바꾸어도 패러다임은 변하지 않는다. 비전이 담긴 종자는 마음에 먼저 뿌려져야 한다. 학교는 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스승은 자신에게 종자를 뿌린다. 자신에게 뿌린 종자만이 비전을 창조한다. 홀어머니가 지금도 하시는 말씀이 있다. "썩을 놈의 종자는 되지 마라."
중년의 남성에게는 호감이 없던 계림의 화랑이 항미원조의 나라와 맞서더니 아시아를 넘어 비상한다. 성실함에 겸손까지 갖춘 밴드가 시대의 아픔을 담은 노래로 빌보드 첫줄에 그 이름을 올렸다. 한글로 전해진 희망의 메시지가 지구 한 바퀴를 돌아 계림으로 금의환향 했다. 전국이 '으르렁'거릴 때만 해도 그들의 등장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작은 기획사 출신의 그저 그런 꽃미남 정도로 여겼다. 좀 인기가 생기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거나 음악 외의 길로 나가려니 했는데 세속오계를 실천하는 21세기 화랑이 될 줄이야. 큰 기획사 소속이 아님에도 물러섬 없이 8년째 전진하였고(無退), 인종과 국경을 구별하지 않은 채 자신의 팬과 소통하였으며(有擇), 7명이 하나가 되어 상호 존중하는 공동체를 꾸려왔다(以信). 자신의 성공과 성실로 부모에게 기쁨을 줄 뿐만 아니라(以孝), 한국의 문화를 세계인 맘속에 깊게 각인했다(以忠). 방탄을 좋아하는 우리 반 학생을 불러놓고 멤버들이 각자 이룬 성과에 따라 140억을 차등지급 해보자고 제안했다. 세 명의 여학생들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런 아이들에게, MMA와 MAMA 시상식에서 윤기(슈가)가 어깨 수술 때문에 빠졌는데도 공동 분배해야 하는 근거를 대보라고 재차 물었다. 진지한 소녀들은 수행평가 때보다 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 입장을 충분히 듣고 난 후에도 짓궂은 질문을 다시 했다. "140억을 상중하로 나누어서 지급하고 하위로 분류한 이유도 써봐." 절대로 구분할 수 없다고 하면서도 담임의 강압에 2:3:2로 나누었다. 그들이 작성한 답안지에는 단점이 하나도 쓰여 있지 않았다. 오히려 장점을 더욱 돋보이게 썼다. 못된 담임의 질문에 어린 소녀 아미들은 현명한 양심을 보여주었다. 방탄의 팀워크가 학교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학생이 자기 주도 학습을 하는 동안 교사는 전문적 학습을 하고, 학생이 사회적 감성을 기르는 동안 교사는 동료와의 워크숍을 길러야 하지만, 차등지급 되는 연말 성과급 앞에서 쉽게 분열해 버린다. 갓 태어난 민주적 협의가 정착되기 전이라 공동체의 팀워크는 보이지 않고 교육 경쟁력도 제자리인데, 달콤한 성과급 제도는 20년째 사라지지 않는다. 공동체의 팀워크와 경쟁력이 한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어린 아미도 하고 있는데 왜 교육부만 모른 체하는가! 방탄이 노래한 삶은 교실 수업에서도 지속되어야 한다. 비대면 수업은 대면 수업의 그림자일 뿐이라고 주장한 사람들, 그리고 궤도가 덜 갖춰진 쌍방향 수업의 효과를 지적하는 데만 에너지를 쏟는 사람들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춰진 것 같았다. 정말로 '끝이 보이지 않아. 출구가 있긴 할까. 발이 떼지질 않아.' 핑계와 변명을 이젠 뒤로하고 우리도 무퇴(無退)해야 한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자 쌍방향 수업을 더욱 강조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대면 수업에서도 이루지 못한 성과를 비대면 수업에서 이루라고 한다. 일 자체가 힘들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일의 의미를 모르고, 그 일에 대한 인정이 없기 때문이다. 성과급은 자발적 노력과 상호 인정의 노력을 불태워버린다. 언젠가는 성과급 자체가 불태워지리라 믿으며 우리도 교우(交友)해야 한다. 교육부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착한 일을 한 것으로 인정받은 교원에게도 달갑지 않았다. 개발독재 시대에 상대적으로 박봉을 받으면서도 교단에서 자긍심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학부모로부터 받은 존중과 학생들로부터 받은 존경의 힘이 관리자의 감시의 힘보다 컸기 때문이다. 그것이 최고의 성과급이었다. 대체 불가한 업무를 하면서 주어진 일을 창의적으로 개선하고 있는 모든 교원들이 금전의 크기와 상관없이 최고의 성과급을 받기 바란다.
충북 인구가 적어 서울대 합격자 수도 적은 줄 알았다. 학생 수 대비 입학 비율로 따져보니 전국 꼴찌란다. 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서울대로부터 받은 자료로 촉발된 충북의 학력 논란이 수능을 앞둔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학력이 하향평준화 되었다는 여론이 교육감을 가만히 있지 않게 했다. "아직도 서울대 입학이 학력의 기준입니까? 서울 주요대학 입학생 수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의학계열, 교육계열, 과학계열의 학생 수는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서울대 중심에서 학과 중심으로 사고 전향을 해야 합니다. 3년 전 시행한 고입 균등배정 정책 때문에 오히려 학력이 높아졌고 모든 학교가 동반 성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교육감은 2015년부터 초중 혁신운동을 강하게 지원하였고 2017년부터 중학교 졸업생들이 청주 지역 고교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못하게 했다. 보수적인 도의회는 교육감의 두 정책을 지지하지 않았고, 충북교총과 충북교육학회는 균등배정 정책을 전국 꼴찌의 원인이라며 비판하였다. 정말로 주요대학 입학생 수는 증가하였을까? 연대는 강원도에도 있고 고대는 조치원에도 있다. 분교 입학의 비율을 묻는 도의원의 물음에 부교육감은 답변을 못했다. 중복 합격자와 재수생이 포함된 통계의 결과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중앙정부도 정책의 효과를 발표할 때는 입맛에 맞는 통계만 고르기 십상이다. 現 교육감이 출마 전에 몸담았던 충북교육발전소는 이걸 잘 알고 있었다. 前 교육감은 학업성취도평가에서 전국 최우수를 4연패 했다고 선전하면서 2013년 수능 1,2등급 비율이 전국 최하위권이라는 사실은 묻었다. 연구소는, 기초학력 탈출을 통해서 학부모들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하였으나 사고력을 중시하는 수능에서는 흉작이라고 비판하였다. 또 학력에 영향을 미치는 큰 변인은 학교와 교사가 아니라 개인과 가정이라고 주장하였다. 묘하게도 前 교육감 체제가 現 교육감보다 더 많이 서울대에 입학시켰다. 2013년 그 때가 정점이고 2020년은 바닥이다. 도의원들은 무시했지만, 교총과 참교육학부모회가 던진 공통 질문이 있었다. '2017년도 고교 입학생의 성적은 동일한데 그들의 졸업 성적은 왜 다른가?' 청주의 S고는 6명의 재학생이 서울대에 가는데 왜 어떤 곳은 못 가거나 겨우 한 명인지 묵묵부답이다. 6배의 차이에 대해 침묵하는 것보다 더 안타까운 점이 있다. 20만 명의 수련생들에게는 '충북형 미래학력'을 익히라면서 그것을 창시하신 분들은 싸움 구경꾼들 앞에서 품세 한 자락도 보여주지 못하고 상대와 똑같은 주먹질만 하고 있었다. 하위 50%도 '미래 학력'은 있어야 한다. 졸업 이후를 위해서라도 '자기 주도 학습'뿐만 아니라 '사회적 감성'과 '민주적 역량'도 상하위 가리지 말아야 했다. 모두를 위한 역량 활동은 겨우 한두 번만 하면서, 상위자를 위해서는 밤늦도록 매일 자율학습을 시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이런저런 말로 포장된 학력은 그저 대학가는 능력일 뿐이다. 공교육 정상화의 온실 속에서 수시를 위한 내신관리만을 학교가 할 뿐이고, 수능정시는 개인의 능력과 학부모의 재력에만 맡겨지는 상황이라면, 균등배정 정책 외에 교육력 향상을 위한 길은 따로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개인의 능력과 학부모의 열정이 결합된 학력이 있어야 대학진학이 가능하지만, 때로는 학교의 교육력이 그 한계를 극복하기도 한다. 청주 S고의 올해 성과가 작년과 같은 것은 그 학교만이 가진 교육문화가 실제로 살아있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교육 비전을 현실화하려는 학교장의 의지와 교사의 부단한 노력 없이 어찌 서울대로 보낼 수 있겠는가? 개인의 학력을 묻기 전에 학교의 교육력을 지역 도민들에게 드러내야 한다.
'남자의 자격'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었다. 서구적 외모의 박칼린이 등장하여 넬라판타지아 합창을 감독하던 순간에는 남자로서의 자격을 갖추는 시간을 벗어나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보는 '사람의 자격' 시간으로 변화되었다. 늦은 밤에 걸려온 민원 전화로 힘들어 하는 교사를 만났다. 칭찬이 부족하여 교사 자격이 없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내 학부모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격려가 없어도 행동이 변화되면 칭찬을 아끼지 않지만, 공부를 잘하는 아이라도 별다른 변화를 보여주지 않고 성장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칭찬보다는 격려를 한다. 아낌없이 정직하게 사용하는 칭찬만이 가르치는 맛을 깊어지게 한다고 믿었다. 마음씨가 고운 교사였다. 발표를 주저하는 아이의 한 마디에도 칭찬을 해주었고 지각하던 아이가 일찍 오는 날에도 칭찬을 하였다. 교과서만 가지고 와도 칭찬을 해주었다. 기회를 주어도 망설일 경우 무조건적으로 칭찬을 하지 않는 것은 나와 같았다. 위선의 칭찬은 처음만 사용했다고 한다. 공개적인 칭찬은 위선적이지 않아야 효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감기에 걸린 환자에게 항생제를 쓰는 정도가 의사마다 다른 것처럼, 자기도 칭찬의 명약을 표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하였다. 하지만 자녀의 말만을 믿는 학부모를 당할 수는 없어서 한발 물러나 버렸다. 다른 아이들에게 계속 명약을 처방하는 힘을 얻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한다. 쓴 웃음 짓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삼일절을 지나 개학을 하자마자 진단평가를 하던 때였다. 모두가 열심히 참여하고 있는데 이름을 쓰기 무섭게 엎드리는 아이가 있었다. 최선을 다해 끝까지 하라고 독려했다. 직접 허리도 펴주었다. 하루가 지나 토요일에 전화가 왔다. "당신 때문에 우리 아이가 힘들어 합니다." 공개된 교실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 후로도 책상에 앉는 자세 문제로 그 아이와 씨름을 해야 했다. 다시 전화가 오지 않았으나 이런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신 아이 때문에 저는 여전히 힘들어 합니다." 학년이 바뀌어 우연히 다른 교실에 들렀다. 급우들 사이의 대화에 주력하는 담임의 맘을 헤아리지 않고 담임하고만 말하려는 아이가 눈이 띄었다. 발표 기회를 주지 않아도 혼자 떠들고 선생님의 질문이 끝나기 전에 혼자 계속 중얼거리거나 말을 건다. 납득할 수 없는 그의 큰 소리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 아이의 상태를 기록하여 동석한 동료에게 주었더니 읽고 웃는다. "그 아이가 그 아이입니다" 교원도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인권을 존중하면서도 잘 가르치고 민원 전화를 친절하게 대했더라도, 그리고 업무를 민주적으로 운영하는 책임자로 소문이 났더라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직원과 협력하는 자세를 위해서는 별도의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료를 향해 던진 비난의 고성이 회의실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것을 막지 못한다. 부당한 민원을 제기하는 학부모에게 협조를 요구하기 전에, 태만하고 자기중심적인 학생들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에게도 교편을 들 줄도 알아야 한다. 학부모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상황을 상상해 본다. "우리 아이가 남을 배려하나요? 자기 혼자 잘난 척만 하고 혹시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는 않나요? 친구 말을 경청하면서 자기 생각을 표현하려고 꾸준히 노력하나요?" 현재의 교육과정은 불교·유교가 추구하는 이념에 착안하여 인간의 자격에 해당되는 두 가지 원리를 새겨놓았다. 자기에 대한 성실(誠實)과 남에 대한 배려(配慮)가 그것이다. 학부모의 배려와 교직원의 성실이 학생의 미래를 연다.
자애롭고 지혜롭다기에 부모와 스승으로 모셨고, 일한만큼 한 솥에서 밥을 퍼준다기에 그릇까지 맡겼다. 시간이 흘러 생명과 자유가 담겼던 밥그릇을 빼앗긴 백성들은 봉기를 하거나 유랑을 해야만 했다. 하늘마저 외면하여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자 신라가 쪼개지고 고려가 흔들렸으며 조선의 주인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이 쪼개지고 흔들린다면 그 때도 이와 같으리라. 조선의 주인이 바뀌기 십년 전, 전봉준은 조병갑으로부터 빼앗은 밥그릇에 신분제 폐지와 토지 분배의 天命을 담았다. 코로나가 다시 유행하는 올해 늦여름, 정권에 대항하여 검사, 의사, 목사, 재벌, 투기꾼 등 제법 큰 밥그릇을 가진 무리들은 지금 무엇을 담고 있는가? 대통령이 고종인지, 현 정권에 대항하는 그들의 밥그릇에 어떤 천명이 담겨져 있는지 명확히 보여줘야만 한다. 정치적 선동과 법적 투쟁 소리만이 드높고 언론과 방송에는 앵무새만 드글거린다. 주걱을 쥔 자들은 밥솥의 주인이 백성이라는 것을 잊으려 한다. 수십 년간 쥔 주걱으로 대통령도 죽이고 살리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인지 전관예우로 막대한 그릇을 챙기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그 주걱이 세 개로 쪼개지려 하자 야당과 손잡고 공수처와 수사권 조정을 거부한다. 문재인 케어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의협은 공공의대를 설립하려는 정권에 맞선다. 국민 건강을 명분으로 진료를 거부하였으며 국민이 불입하는 건강보험료를 관리하려 한다. 정권에 대항하더라도 천명을 거스르지는 말았어야 했다. 목사는 대통령을 빨갱이라 규정하고 질병본부의 코로나 방역까지 거부하고 있다. 평화의 복음 전파는 뒷전이고 바이러스가 전국으로 전파되어도 아랑곳 하지 않은 탓에 한 달 넘도록 밥그릇을 챙기지 못하는 사람이 늘어났을 뿐이다. 삼성의 이재용은 자신의 재산이 7조 원이 되는 동안 부정이 없었음을 법원으로부터 판정받아야만 한다. 언론은 그의 밥그릇에는 잉크 떨어진 펜으로 침묵하지만, 조국 딸과 추미애 아들에게는 폭탄을 투척하듯 잉크를 뿌려댄다. 의사와 검사의 밥그릇 힘은, 시험 능력이 우수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주는 입시제도 덕이다. 이재용의 밥그릇 힘은, 아버지가 25년 전에 준 종자돈 61억과 회장님의 뒷배가 있어서였다. 목사의 밥그릇 힘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라면 양심과 법질서까지 무시해도 된다는 풍토가 있어서였다. 주택 투기꾼의 밥그릇 힘은, 건설업과 언론이 주도하는 거대한 카르텔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현사회의 제도로부터 받은 혜택에 대해서는 둔감한 채, 정부가 공공성 혹은 공동선을 강조할수록 사회주의 정권이라며 민감하게 매도한다. 소중하지 않는 밥그릇은 없다. 이기적인 밥그릇일지라도 타인을 해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 밥그릇을 지키는 마음에 이타심이 없다고 누가 탓하랴! 우리의 저녁 식사가 넉넉한 것은 푸줏간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고 배웠고, 솥이 커지면 더 많이 먹을 수 있다고 믿었다. 백 년 전 스페인 독감을 연상시키는 상황에서 솥이 작아지고 있는데 남의 그릇에 손대려 한다. 남의 그릇에 손대는 사람들이 교육의 최대수혜자들이라 안타깝다. 학교에서는 합리적 토론과 상호존중의 미덕을 잘 배운 척 하더니, 사회에 진출해서는 물려받은 머리와 재산으로 자신의 그릇만을 키우는 데만 몰입을 하고 있다. 그런데도 흔들리지 않는 대한민국을 위해 교육계가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쌍방향 수업을 확대하는 것에만 있어 더 안타깝다. 전봉준의 天命은, 백성과 함께 그들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마음이다. 이타심은 바라지도 않는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을 해치는 악마의 마음이 아니길 바랄뿐이다. 종교계와 교육계에 무너지지 않은 마지막 등대가 있다면, 이기심의 불이라도 켜져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
일찍 온 폭염을 장마가 밀어냈다. 격주로 등하교하는 둘째를 교문에서 태우고 넉넉한 저녁을 위해 빗소리가 들리는 창가 옆에 앉았다. 숯불에 막창과 뒷고기를 올려놓고 코앞에 닥친 시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그 사이 느닷없는 질문이 날아온다. "제가 갈 때도 반대하실 건가요? 반대 이유 다섯 가지만 말해주세요." 순간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 말이 이어진다. "성적이 돼도 가지 말라 하셨다면서요? 하시는 일들을 늘 자랑스러워 하셨잖아요, 재미있어 하셨고요. 그런데 우리는 왜 그런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거죠?"고기가 익었다. 뚜껑을 제거한 후 기울어진 병목에서 흐르는 계곡 물소리를 빈 잔에 담았다. 둘째는 아직도 젓가락을 들지 않는다. "음, 초등교사 생활도 참을 수 없을 만큼 힘든 일이 많기 때문이야." 불향을 먹은 뒷고기와 막창을 번갈아 씹으며 다음 말을 궁리 했다. 불만족스런 대답에 푸념을 한다. "첫 번째 이유는 납득되지 않네요. 말 안 듣기로는 초등보다 중등이 심하잖아요. 그래도 이유를 대셨으니 나머지 네 가지나 말해 주세요."입 속의 막창이 질겨졌다. 뒷고기도 씹을수록 퍽퍽하다. 이젠 병목을 기울여도 계곡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교사는 수업만 하는 사람이 아니야. 수업과 무관한 잡무가 의외로 많아. 물론 중등교사도 잡무가 많지. 그러나 중등교사는 특정 교과에 따라 업무가 주어지지만, 초등교사는 모든 교과를 다루기 때문에 어떤 업무이든 맡겨지지. 학교를 옮기면 더 심하고." 둘째는 내 이야기에 토를 달지 않고 다음 이유를 듣기 위해 고기만 씹고 있다. "다루는 지식이 하찮다며 수업을 경시하는 문화가 있다. 학기말에 수업의 꽃을 피우려는 순간 장기 체험학습 신청서를 받게 되면 타오르던 사명감도 흩어진다. 후배를 잘 가르칠 수 있다며 우쭐댔던 너의 6학년 시절을 떠올려봐. 지식은 가깝고 인성은 멀며, 학교 탓이라 말하기는 쉽고 학교 덕이라 말하기는 어렵지." 돼지 껍데기가 불판에서 튀는 소리가 들린다. 먹지만 말고 뒤집으라고 시켰다. 교실에서의 존재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홀로 애쓰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위로의 쓴잔을 들어 올렸다.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남겨두고 막창을 추가하였다. "네 번째 이유는 전문가가 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어렵기 때문이다. 아홉 개가 넘는 교과의 내용을 1년에 오직 한 번만 가르친다. 같은 내용을 3년간 반복하면 누구나 유능한 전문가가 되지만, 초등이라는 자리는 성실한 사람에게도 전문성을 허락하지 않는다. 사실 6학년을 4년 연속했었고 나 자신을 성찰하려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지만, 학교가 바뀌고 학년이 바뀌면 남는 것이 없더군. 올해도 빈손으로 시작하였고 코로나 때문에 허둥지둥 댔다." "에이, 아빠가 주관한 독서캠프에 저도 참여했잖아요. 그 때 아빠는 전문가 같았어요. 45명이 동일한 주제로 1박 2일 동안 다양한 활동을 하도록 기획했다는 것은 아빠가 전문가라는 증거예요." 지가 뭘 안다고 나를 위로하는가! "아무튼 난 네가 가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다 말했다. 고기 더 시킬까?"생각해 둔 마지막 이유가 있었으나 말해봤자 이해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지막 이유가 남았네요." 고기보다 질긴 질문에 마지막 대답을 했다.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고 자신을 가르쳐라. 교사는 아는 체 하거나 착한 척 할 때가 많아. 넌 그렇게 살지 마." 병목에서 다시 계곡 물소리가 들렸다. 오는 비는 더 굵어졌고, 불향 흡입만으로도 부자의 배가 불렀다. 우산 하나에 네 개의 어깨가 들어갔다. 집으로 향하는 동안 아들 손을 놓지 않았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 부디 행복하게 살기 바라는 마음을 그 손에 담았다.
"일제 30년은 황국신민을, 독재 40년은 반공투사를, 최근 30년은 인적자원만을 길렀다. 단 한 번도 존엄한 인간, 성숙한 민주주의 교육을 해본 적이 없다." 정세균 총리가 주관하는 목요대화에서 중앙대 김누리 교수가 윤은혜 부총리를 보며 한 말이다. 그는 최근 방송과 출판을 통해 지난 100년의 교육을 반(反)교육이라 단정하고 입시와 대학서열 폐지운동을 하고 있다. 독문을 가르치는 김 교수는 교육현상의 본질을 설명하는 학자가 아니라 다시 나타난 선동가일 뿐이다. 모두가 반교육을 받았다면, 독립운동은 누가 할 수 있고 민주화 운동을 전개한 동력은 어찌 설명하려는가? 반교육에도 불구하고 정치, 경제, 대중문화, 의료가 선진화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일본과 중국은 꿈도 못 꾼 위업이 지금 한반도에 일어나지 않았는가? 교육을 제외한 분야에서 선진국이 달성하지 못한 모범 사례가 쏟아지고 있는데 오직 교육만 후진적이고 지옥일 수는 없다. 교육은 사회의 한 부분이지만, 교육이 곧 사회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긍정적인 면에 교육이 기여한 바가 있을 것이며, 반대로 부정적인 면이 있다면 교육도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온갖 어두운 책임만을 교육이 맡고 미래의 밝은 모습은 하나도 없다는 주장은 비논리적이고 부도덕한 발언이다. 진보 교육감 출신의 김상곤 장관이 입시를 지옥에서 건지고자 수능을 절대평가로 전환하려다가 교육야당의 비판에 물러나버렸다. 야당은 입시의 공정성에 무게를 두고 정시의 확대에만 관심을 두었다. 김누리가 후임자 윤은혜를 보며 목청을 높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한국교육을 비판하는 수많은 야당에 대항하여 교육여당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대변한다. 학교는 학생들에게 지식만을 가르치지 않는다. 유치원은 돌봄과는 차원이 다른, 아동의 감성을 깨우는 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야당과 달리 문자 지도를 하지 않았다. 초등은 습득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모둠협력 활동을 설계하느라 야당과 달리 선행을 하지 않았다. 중등은 전문 지식을 강의한 후 독서·논술 활동을 하느라 야당과 달리 문제 풀이에 집중하지 않았다. 통합된 배경지식과 仁義의 공감능력이 내면화되도록 모든 학교 구성원이 달려들었다. 다만 입시 문턱이 거칠어 상위 25% 학생이 지나친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 검색은 마법의 지식주사기가 아니다. 체계화된 지식이 없다면, 검색만으론 문제인식마저 불가능하다. 인간이 동물보다 오랜 돌봄과 교육을 받듯이, 한국은 다른 나라보다 체계화된 배경지식을 더 많이, 더 오래 배우도록 계획했다. 성인이 되기 전에 인류의 유산과 문명을 이해하도록 중점을 두다보니 중등에서는 토의활동보다는 독해력 활동이 길었다. 그 덕에 대학수학능력이 높아졌으며 고교만 졸업해도 자신의 끼를 발휘할 수 있는 교양을 갖춘다. 학교에게 모든 것을 요구하면서 이 모든 것을 최고로 하지 못한다고 욕하지 마라. 교과 외의 창의적 체험활동 종류만도 십여 가지이다. 통일, 독도, 양성, 폭력, 민주, 환경, 정보, 안전만으로도 지쳤는데 창의성이 없다고? 그 지겨운 소리에 신물이 난다. 그런 역량은 양심처럼 모든 노력의 총화이지 시작점이 아니다. 세계적 문제 상황 앞에서 배달의 국력이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데 무슨 근거로 역량이 부족하다 말하는가? 현 상황을 개혁하는 것과 의도마저 폄훼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미영, 핀란드, 독일을 부러워하기 전에, 70이 넘은 백범 김구가 당시 교육자에게 호소한 말을 떠올려보자. 지식을 통하여 '서구의 自由와 동양의 仁義를 가르친다면, 아름다운 문화 강국이 되어 세계사의 주연배우가 되리라. '분열된 야당소리를 합쳐 개혁의 첫 단추를 제시해야 할 때이다.
6월에는 애달픈 비목(碑木)의 곡조가 한반도에 울린다. 75년 전, 가난한 소년은 땔나무를 하던 친구랑 해방을 맞았다. 탱크가 삼팔선 위로 물러난 뒤 강원 화천 백암산 계곡에서 북을 향해 총부리를 겨누던 달빛 아래, 화약 연기를 뚫고 날아온 탄환이 가슴에 박힌다. 양지 녘에 돌무덤이 만들어지고 십자 나무가 세워졌다. 10년이 넘도록 돌보는 사람 없고 비바람만이 돌무덤을 감싸는 동안, 울어 지친 비목에 낀 이끼만이 외로운 망자를 위로해 준다. 유신의 불꽃이 끄먹거릴 때, 김민기가 만든 상록수를 양희은이 부른다. "돌보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온 누리 끝까지 맘껏 푸르다." 애국가 2절의 소나무와 달리 비장함이 느껴진다. 비목은 죽은 자를 위로한 기념비였지만, 푸른 솔잎은 대자연이 가난한 자에게 준 기념비였다. 학교는 닮아야 할 삶의 모습으로 소나무를 선정하여 교목(校木)으로 삼았다. 북한 주석 김일성 숨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노래패 꽃다지가 바위처럼 살자 하였다. "모진 비바람이 몰아친대도, 어떤 유혹의 손길에도 흔들림 없는 바위처럼 살자꾸나." 왜 바위처럼 사는가? 작은아들이 입학한 남고와 우리 동네 여고 교정에 서 있는 커다란 바위에는 학생이 평생 맘에 품을 덕목을 새겨 교훈(校訓)으로 삼았다. 6년 전, 핵심역량 아이디어와 함께 세종청사 14동 마당 바위에 공교육 정상화 문구가 새겨졌다. 입시와 내신의 상대평가가 이미 철갑을 두른 상태에서 선행학습만 근절하면 사교육비와 학습 부담이 줄고, 자기 주도 학습이 늘어나면서 공교육이 정상화된다고 선전하였다. 부담은 줄지 않았으며 학생 주도의 창의력 학습에 대한 비전은 '미래를 여는 행복 교육'이라는 구호 속으로 숨어버렸다. 영국이 버린 핵심역량과 미국이 실험하다만 미래교육이 교육청 마당 바위에 혁신미래학교라는 이름으로 새겨졌다. 철갑을 제거하지 않으니 흔들리지 않을 리가 없다. 지금은 수업의 의미마저 흔들리고 있다. 수업은 강의와 달리 대화를 통한 탐구과정이라 생각했다. 자율적으로 탐구하도록 동기를 유발하고, 또래 집단끼리 소통하고 협력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여겼다. 최종적으로 자신만의 개성을 표현하는 만큼 성장한다고 믿었다. 그런 수업은 이젠 사라졌다. 25년 경력의 교사가 온라인 공간에서 동기유발을 하느라 교생처럼 허우적거린다. 교실에 와도 얼굴을 가리는 마스크는 서로의 감정을 빠르게 읽고 반응하지 못하게 하였다. 대면수업의 비바람과 온라인수업의 눈보라가 번갈아 몰아친다. 급식까지 흔들릴 줄 몰랐다. 코로나 정보가 쏟아졌지만 맘 카페와 쌤의 소통메신저가 따로 굴러 갔다. 국물을 주지 않는다고, 부실한 식사가 제공된다고, 더 먹게 해주지 않는다고 민원이 제기되었다. 방역 당국의 지침에 따라 최적의 급식을 설계한 맘에 비난의 화살이 꽂아지자 굳게 서 있던 다리가 흔들렸다. 여린 양심은 비바람 앞에 쉽게 무너진다. 기초 부진과 생활 부적응에 항상 신경을 썼던 마음은, 단 한 명의 학부모 민원에도 반응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 민원이 학교와의 합리적 소통으로 다가오지 않고 교육청과 청와대를 통해 내리꽂으려 하면 열정의 날개를 접고 떠날 곳을 물색한다. 총 맞은 것처럼 쓰러지는 교사를 옆에 두고 있는 동료의 맘도 끝없이 추락한다. 불통의 비바람은 산 자를 죽은 자처럼 만든다. 백지영이 노래한 대로 정신은 없고 웃음만 나온다. 삼부인의 환웅이 태백의 신시학교 바위에 새겨놓은 글자가 우리 마음에 새겨질 때까지는 외롭고 그리운 비목이라도 붙들고 있어야 한다. 한두 가락 붙잡은 곡조에 의지하며 두 다리에 힘을 준다. ♬깨치고 나아가~ 끝내~ 이루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