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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익현

건축사

봄이다. 매화 가지 스쳐온 맑은 바람, 달큼한 청향(淸香)이 코에 스민다.

바야흐로 꽃들이 저마다 뽐내고 신록이 향연을 펼칠 봄,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이 있다. 바로 봄마다 손·발이 잘린 나무이다. 얼마 전 아파트 주변 큰 나무들이 보기 흉하게 잘려 나간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10여 그루가 거의 참수(斬首)당한 수준이었다. 그냥 전봇대나 다름없었다. 가을이면 노란 잎으로 눈을 환하게 했던 큰 은행나무도 뭉텅 잘려 삼지창이 되었다.

몇 년 전에도 이처럼 많은 나무가 잘렸다. 특히 주민 모두가 아끼던, 감이 주렁주렁 달려 가을의 정취를 한껏 느끼게 했던 감나무가 밑동부터 베어졌을 때 나는 동 대표 회의에 참석하여 한 마디 했다. '나무를 자르는 것은 한순간이나 나무가 자라는 데는 많은 세월이 필요하다. 자라면서 형태가 만들어지고 그 나무들이 아파트 경관을 살린다. 낙엽이 진다고, 열매에서 냄새가 난다고 무참히 잘라 버리면 이 땅에 온전히 살아남을 나무는 없다.' 그러나 왠지 그들에게는 공허한 메아리 같았다. 이번에 또다시 나무가 잘리고 보니 사람들의 잔인함에 마음이 편치 않다.

예부터 사람들은 짐승이나 자연의 사물을 의인화(擬人化) 하여 그 덕(德)을 칭송했다. 이태준 선생은 수필 <물>에서 '남의 더러움을 씻어 줄지언정, 남을 더럽힐 줄 모르는 어진 덕이 있다.'고 물의 덕성을 칭송했고 조선 후기 이유원은 <임하 필기(林下筆記)>에서 부채의 여덟 가지 덕을 예찬했다. 어떤 사람은 소와 닭도 덕이 있다 했다. 나무도 예외는 아니어서 이양하 선생은 그의 수필 <나무>에서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고 했다. 그러나 요즘 같아서는 나무도 참는 데 한계가 있지 않나 싶다.

어린 시절, 2월이면 사과나무 가지치기를 시작으로 우리 집은 분주했다. 연료가 부족했던 때라 잘린 가지들은 땔감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동생과 나는 큰 가지를 하나씩 골라 1㎞를 걸어 집에까지 끌고 오곤 했다. 출렁이는 나뭇가지의 느낌이 좋아 먼 길도 마냥 즐거웠다.

과일나무는 이른 봄에 가지를 솎아 내거나 잘라주는 전정(剪定)을 한다. 전정은 과일 농사에서 중요하다. 나무에 햇볕이 골고루 들어가게 하여 수확량을 최대로 늘리고 나무 형태를 잡아 주며 과일이 고르게 달리게 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나 요즈음, 재배의 편리함과 수확량에만 초점이 맞춰진 배·복숭아·포도의 기형적인 모습에서 양계장의 닭이 떠올라 마음 아프다. 이 땅의 어린이들이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제 속성 그대로 자란 과일나무를 보았을 때 제대로 알아볼지 의문이다.

아파트 주변뿐만 아니라 인근 대학교 운동장 주변의 수십 년 된 풍채 좋은 플라타너스도 최근 큰 가지가 뭉텅 잘려나가 전봇대처럼 되었다. 여름에는 그늘을, 바람이 불면 큰 잎을 파닥거리며 음악을 선사했던 나무가 관리자의 '생각 없음'에 무참히 참수되었다. 나무 관리가 편해진 대신 많은 사람의 즐거움이 사라졌다.

가로수도 비참하기는 마찬가지다. 시내 가로수도 연례행사로 잘리고 상당산성에서 미원 가는 512번 도로의 메타세쿼이아도 전신주가 있는 쪽은 사정없이 잘려 솜사탕처럼 된지 오래이다. 이와는 반대로 청남대 진입로의 목백합이나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를 보며 같은 나무라도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그 처지가 복불복(福不福)이라는 생각이 든다. 도시에서 가로수는 하나의 생명체라기보다 장애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온갖 매연과 소음에 시달리는 것도 억울한데 낙엽이 진다고, 간판을 가린다고, 그늘이 진다고 갖은 죄목을 씌어 무차별 손·발을 자른다. 가지치기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나무도 생명체인 이상 인간의 배려가 필요하다.

관광지의 나무도 힘들다. 3년 전 강진 '다산초당'에 갔었다. 초당으로 가는 오르막길은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에 나무뿌리가 온통 밖으로 튀어나와 그 자체가 계단이었다. 나는 뿌리가 다칠 새라 빈 곳을 찾느라 땀을 흘렸다. 뿌리 위에 흙을 뿌리고 덮개를 깔아주면 어떨까 생각했다.

나무도 아프다, 당신이 아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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