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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청주오송도서관 운영팀장·수필가

도심 한복판 대낮의 공원은 군데군데 무리 지어 윷판을 벌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친구들과 약속 장소였던 의자에 앉아 옛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은 마음에 찾았건만. 삼삼오오 의자에 앉아 이야기 나누던 교복 입은 학생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형언할 수 없는 낯섦에 마음이 허전하다.

홀로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은행나무 아래서 윷판을 벌이고 있는 어르신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농악을 울리며 신명 나게 놀던 어르신들의 모습이 아니다. 그저 애꿎은 땅바닥에 윷가락을 던지며 신세를 한탄하고 있는 듯하다. 가장이란 이름으로 집안을 호령하던 당당했던 모습을 엿볼 수도 없다. 손은 주머니에 찔러 놓고 몸은 움츠린 모습들. 축 처진 어깨들이 오늘날 우리 아버지들의 모습이려니 생각하니 먹먹하다. 이맘때면 앞마당이 넓은 옆집 친구네 집에서는 "윷이다" 하며 "한사리 더"를 외치며 박장대소하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멍석 위로 떨어지는 윷가락의 어정쩡한 모양에 "도"다, "모"다 실랑이를 벌이며 왁자지껄하던 광경. 말판을 놓고 "잡아라, 업어라" 신경전을 벌이며 시끌시끌했던 장면. 마당 한쪽에선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를 자르던 아주머니의 표정. 막걸리 한 사발에 짠지를 얹은 부침개로 정을 나누던 정경. 영화관 자막이 올라가듯 하나씩 소환되어 스쳐 지나간다.

멍석 위에서 벌어지던 윷가락들의 묘기에 터져 나오던 웃음과 탄식도 막걸리 한 사발에 다 녹아내리던 시절. 그때는 아버지들의 "에헴" 기침 소리에도 당당함이 묻어있었는데. 은행나무 아래에서 듣는 윷가락 소리는 아버지들의 텅 빈 주머니만큼이나 허허하다. 저녁나절이 되니 여기저기 윷을 놀던 사람들은 하나, 둘 사라지고 한 무리만 남아있다. 어둑해진 시간, 땅바닥에 뒹구는 윷가락들은 윷을 놓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요란하다. 돌아갈 곳은 있기나 한 건지. 허기진 배를 채울 끼닛거리는 있는지. 괜한 걱정이 들며 온종일 집 안에 있을 어머니 얼굴이 겹쳐진다. 며칠 동안 다녀온 여행 끝에 관절염이 돋아, 오늘도 텔레비전 채널과 씨름하고 계실 것이다. 얼마나 오래도록 텔레비전을 보아 왔는지 드라마 할 시간을 다 꿰뚫고 있다. 그러고 보면 팔십이 넘은 어머니 연배 어르신들이 마땅히 할 거리도 없는 듯하다. 그나마 어머니는 자식들이 집 근처에 살고 있어 자주 들러보니 다행이란 생각이다. 며칠 전 "생활 관리사"를 하는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말벗이 되어드리고 안부도 묻고 필요한 복지서비스를 연계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어르신들을 위한 복지정책에 감동했다. 자식 위하는 마음. 그 십 분의 일만이라도 부모에게 관심을 둔다면 좋겠다는 친구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도둑이 제 발 저리다.'는 말이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토록 깨물어주고 싶고 귀엽기만 했던 자식도 해가 바뀔수록 예전 같지 않다. 자식 낳아 길러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는 말의 의미를 나이가 들어갈수록 실감을 하고 있다. 자식을 둥지에서 내보낼 때가 되니 어머니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겠다. 작은 것에 기뻐하고 감동하는 모습. 아주 사소한 것에도 속상해하는 모습. 온갖 사랑 자식들에게 다 나눠주고 종일 외로움과 사투하고 있지는 않은지. 급속한 사회 환경의 변화가 가져온 가정환경의 변화. 핵가족이 되었어도 자식을 사랑하는 내리사랑은 여전한데. 그동안 어머니한테 소홀했던 나 자신을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럽다. 이제부터라도 부모를 위하는 "치사랑"을 외쳐봐야지. 차곡차곡 통장에 쌓이는 소리가 어머니의 헛헛한 마음을 달래 드리기를 바라며. 명절이나 생신 때 드리던 조금의 용돈도 다달이 넣어 드려야겠다.

윷가락을 던지는 손가락의 현란한 재주도 없이. 하늘 위로 던져지는 쾌감도 없이. 그저 바닥에 던져지는 둔탁한 윷가락 소리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쓸쓸한 우리 아버지들의 비명(悲鳴)처럼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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