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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숙

오송도서관 운영팀장·수필가

 속이 꽉 찬 고갱이가 먹음직스럽게 보인다. 배추 속살인 노란 빛깔은 어떤 맛일까? 입맛을 자극한다. 하나를 뚝 잘라먹어보니 달콤하고 고소한 맛과 향이 입안을 가득 메운다. 튼실한 배추 덩이들은 갓난아기 달래듯 조심조심 다뤄졌으리라. 잎이 꺾이기라도 하면 큰 병에 걸린 듯 법석이라도 떨었을 테지.

 김장 날인 오늘. 소금물에 절여진 배춧잎들은 온천수에 몸을 푹 담그고 나온 살갗처럼 야들야들 축 늘어져있다. 적절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아무리 좋은 반신욕도 너무 오랜 시간하면 건강에 해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큰일을 도모할 때, 적당한 시기와 장소는 그냥 만들어지는 게 아닐 것이다. 심사숙고 끝에 정해진 수고스러움 일 것이다. 간이 잘 베개 절여지는 것도 그만큼 사람의 정성이 깃들 여야만 가능하리라. 너무 푹 절여지면 짠맛이 강할 테고, 덜 절여지면 배추가 살아 있는 듯 통통거리며 꺾이리라. 이맘때면 어릴 때부터 보아 온 장면들이 눈에 선하다. 김장 날이면 전날부터 배추를 빠개고 손질한 다음, 이른 새벽부터 배추를 뒤척이던 어머니의 모습. 배추 한 포기 한 포기를 골고루 절여, 식구들에게 맛있는 김치를 먹이려는 어머니의 정성으로 변신한 배추들의 모습.

 배추 고갱이의 고소함이 입안에서 사라질 즈음. 추억의 파노라마는 사라지고, 잘 절여진 배추를 애틋하게 기다리고 있는 김치 속이 눈에 들어왔다. 갖은 양념과 야채로 맛있게 버무려진 김치 속으로 이제 배추를 치장해 줘야 한다. 배추 꽁지를 붙잡고 김치 속을 집어넣고, 켜켜이 김치 속을 발라준다. 그다음 한복 치마를 감싸 잡 듯, 마지막 한 장으로 한 바퀴 돌려 보호막을 치면, 한 포기의 김치로 탄생한다. 절인 배추들이 모두 김칫독에 차곡차곡 들어가 쌓인다. 어머니의 얼굴엔 겨울 채비를 끝냈다는 행복감이 퍼진다. 어머니의 웃음 속에서 또 한 장의 색 바랜 사진이 떠오른다. 김장을 마친 항아리를 묻은 마당 한쪽 김장독들. 지붕 밑 한 편에 빼곡히 들어찬 연탄들. 수몰돼 가 볼 수도 없는 그리운 고향집 풍경. 그 사진 한 장이 아침햇살처럼 가슴을 따듯이 녹여준다. 김장김치는 그때도 지금도 우리에겐 겨울을 이겨낼 수 있는 든든한 원동력이다. 넓은 밭에 아주 탐스럽게 심어져 있는 배추에게서도 그 듬직함을 느낄 수 있을까?

 김장이 끝나면 달콤하고 매콤한 겉절이로 지친 피로를 풀어줄 차례다. 푹 삶은 고기에 안성맞춤인 배추 겉절이. 쉽고 빠르게 할 수 있지만, 이만큼 나의 입맛을 달래 줄 수 있는 음식도 없으리라. 밥맛이 없을 때, 갖은 양념으로 무친 겉절이 하나만 있어도 입맛을 되찾는다. 그뿐이랴. 라면과 국수와도 궁합이 잘 맞는 음식이 아닐까? 아주 빠르게 사람의 마음을 녹여내는 힘이 있다. 이 또한 배추의 위대한 변신이다.

 배추가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한 묵은지. 오래도록 그 향기를 잃지 않고 은은함으로 다가오는 진국 같은 친구의 모습은 아닐는지. 어떤 식재료와도 조화를 이뤄 색다른 맛을 느끼게 하는 기품 있는 맛. 오래도록 숙성된 깊은 맛이 "빨리빨리"를 외치는 나의 성급함을 나무라는 것만 같다. 서두르거나 포기하지 않고 목표한 바를 차근차근 꾸준하게 실천해 나가는 삶의 진중함을 깨닫게 한다.

 배추의 변신은 내 삶과도 밀접함이 있음을 깨닫는다. 살아오면서 어떤 모습으로 보였을까? 김장김치처럼 사람들에게 힘이 되는 든든한 존재였는지. 아니면 겉절이와 같이 사람들에게 쉽게 동화돼 한 울타리 안에서 살가운 존재로 살아왔는지. 그도 아니면 은은한 향기를 오래도록 피워내는 묵묵함으로 살아왔는지. 나 자신, 본래의 모습을 어떻게 치장하며 살아가느냐. 그 결정은 전적으로 나의 몫일 것이다. '이제까지 어떤 사람으로 비쳤을까?'라는 걱정보다는. 앞으로 어떤 향기, 무슨 색깔로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함이 현명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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