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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8.10.15 20:00:39
  • 최종수정2018.10.15 20:00:39

박영순

커피인문학 저자, 커피비평가협회장

 가을에 커피가 사무치는 이유를 헤아려본다. 그윽한 향기, 손으로 전해지는 온기, 가슴을 지피는 열기. 이것들만으로는 아무래도 부족하다. 그러면, 계절에 묻어나는 서글픔, 이쯤이면 도지는 외로움, 옷깃을 여미게 하는 싸늘함…. 아니다. 커피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픈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다. 가을엔 일단 한 잔의 커피를 준비할 일이다.

 찌르면 시린 물줄기를 뿜어낼 듯 파랗게 살찐 하늘 때문에 울긋불긋 야단스런 단풍이 따스하고 정겹다. 가을의 풍경은 첫 인상이 상쾌한 에티오피아 함벨라 워시드 커피를 떠오르게 한다. 파인애플 같은 활달한 산미로 시작해 아몬드와 캐러멜의 고소함으로 이어지는 복합미가 나의 관능을 한없이 풍성하게 만든다. 색다른 맛이다.

 맛은 색이요, 색은 맛이다. 함벨라 커피가 목을 타고 내려가면서 나의 일부가 된다. 지그시 눈을 감으면 연둣빛이 감도는 신선함이 갈색의 부드러움으로 번져 온몸으로 스며든다.

 커피가 사치보다 귀했던 일제 강점기, 가산 이효석은 갈퀴를 손에 들고 낙엽 타는 연기 속에 우뚝 섰다. 낙엽을 태우며 갓 볶아 낸 커피의 향기 속을 유영했다. 가산은 커피의 면모를 만날 때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이 솟구친다"고 적었다. 암울한 시절을 이겨내야 했던 그에게 커피는 자신을 지키는 '다짐'과도 같은 것이었다. 커피는 살아갈 힘이다.

 소리를 듣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위대한 교향곡을 써낸 베토벤에게 인간승리의 찬사가 쏟아진다. 하지만 그는 청각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에 시골로 잠적해 자살을 결심했다. '하일리겐슈타트 유서 사건'은 그의 삶에 깊게 패인 고통이다. 하지만 그가 이 시기에 작곡한 제2교향곡과 전원교향곡이 쾌활하고 낙천적일 수 있던 데에는 커피의 역할이 컸다.

 그는 모닝커피를 마시며 작곡하는 것을 즐겼다. 창작의 시간, 영감을 주는 것은 '결점이 없는 완벽한 한 잔의 커피'였다. 베토벤은 손수 일일이 잘 볶인 원두 60알을 골라내 커피를 추출하도록 했다, 커피에서 '60'은 '베토벤 넘버'로 통한다.

 가을에는 느린 걸음이 어울린다. 차분한 색상으로 바뀐 자연이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소곤거리는 탓이다.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가 인간 본성의 심연에 다다를 수 있던 것은 덴마크의 '휘게(hygge) 커피' 덕분일지 모른다. 창밖을 보면서 천천히 즐기는 커피, 촛불을 켜고 대하는 명상의 커피…. 그의 커피는 진열장에 준비해 둔 50여 개의 잔을 고르는데서 시작됐다. 같은 커피라도 찰나의 느낌에 따라 서로 다른 잔에 담은 커피는 그를 다양한 사유의 세계로 이끌었으리라.

 교회를 통하지 않고도 신을 만날 수 있다는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은 가장 위대한, 그러면서 가장 위험한 인간의 각성이라고 회자된다. 그가 커피 한 잔에 각설탕을 30개씩이나 넣어 마셨던 것은 쓰디쓴 고뇌에 대한 치유법이었다.

 마초라고 하면 자웅을 다툴만한 헤밍웨이와 생텍쥐페리도 창작의 시간에는 다소곳하게 커피에 빠져든 작가들이다. 커피는 쿠바의 해변 오두막에서 헤밍웨이에게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패배하지 않는다"는 거센 파도보다 강한 의지를 솟게 했고, 야간비행에서 별빛을 조명삼아 책을 읽던 생텍쥐페리에게는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라는 명구를 선물했다.

 커피의 진정한 가치는 '메이크 미 싱크(Make me think)', 곧 '나를 생각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가을 산책길의 유혹을 떨치기 힘든 것은 단풍 때문만은 아니다. 그 길에 생각이 있기 때문이고, 각성으로 이어지는 그 시간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내면을 마주한다.

 커피도 그러하다. 향기와 맛, 그리고 이 두가지가 어우러지며 피워내는 플레이버는 우리로 하여금 고요하게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커피에 가을이 들어있다.

 커피애호가라면 가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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