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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그는 누구인가

가난·시위·인권변호사 ···文의 '3대 과거 키워드'

  • 웹출고시간2017.05.10 00:54:36
  • 최종수정2017.05.10 00:54:55
[충북일보] 문재인 당선자 그는 누구인가. 그는 유·소년 시절부터 19대 대통령 당선까지 드라마 같은 삶을 살아왔다.

◇유·소년 시절-자유의 땅, 그러나 숙명 같은 가난

1953년 1월24일, 경상남도 거제군 명진리 한 시골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피해 남으로 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피난민인 그의 가족에게 가난은 천형과 같았다. 끼니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궁핍한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호남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나서면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가 연탄을 배달했고 연탄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일은 장남인 그의 몫이 됐다.

◇청소년 시절-수재? 문제? 문재인

부산 경남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처음으로 빈부의 격차를 겪게 된다.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여 살던 초등학교와 달리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중학교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사춘기 시절 그는 독서에 빠져 들었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차차 영역을 넓혀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에 이르렀다. 그는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 사회와 인생을 익히고 아픈 현실과 마주한다. 경남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한 그는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대학 입시에서 부모님과 담임의 뜻대로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지만 낙방했다. 이후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대학시절-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대학에 입학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민주주의의 억압이 노골화 되던 해다. 1973년 유신반대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됐다. 1974년 그는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돼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듬해 4월 그는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만다. 그리고 1975년 석방되자마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결국 강제징집 당한다.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문재인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 전두환 준장, 대대장이 장세동 중령이었다.

◇청년시절-우울한 젊은 날의 초상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한 그는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다음해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정진하던 중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져 시대는 격랑에 휩싸였다. 1980년 학교로 돌아 온 그는 복학생 대표로 연일 시위에 가담했다. 그동안 준비한 고시공부가 아까워 1980년 4월 학내시위 중 2차 시험을 치렀다. 같은해 5월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었던 그는 구속되고 만다. 경찰서 유치장에 20여일 간 갇혔던 그는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경찰서장은 축하 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열 수 있게 해 주었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변호사 시절-노무현과 운명적 만남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매월 봉급을 받게 돼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다. 이 무렵 7년간 연애해온 대학 2년 후배 김정숙과 결혼했다. 법대 축제 때 처음 만나 구속과 강제징집, 고시 공부로 이어지는 7년여의 연애 끝에 마침내 결혼에 이른 것이다. 당시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되면서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그는 고향 부산으로 내려가 마침내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처음에 동업자로 만난 둘의 관계는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선후배로 또는 친구처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아갔다.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참여정부 시절-대통령과 함께 국정을 운영하다

2003년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초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을 역임했다. 2004년 자리에서 물러나 히말라야로 트레킹을 떠났으나 도중에 노무현의 탄핵 소추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해 변호인단의 간사를 맡았다.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대통령비서실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냈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선후보가 20일 청주시 성안길에서 열린 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 김태훈기자
◇정치입문과 대선도전-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위해

이후 정계입문 제의를 받았고, 2012년 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해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같은 해 대선 출마를 선언해 손학규, 김두관, 정세균 등과 겨뤄 전국 순회경선 13회 전승을 거두며 민주통합당 18대 대선 후보로 확정됐지만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에게 패배했다. 2015년 2월8일에 새정치민주연합 당대표에 선출됐고, 2016년 1월까지 새로 개편된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지냈다. 대표직에서 물러난 뒤 20대 총선에 출마하지 않았지만 더불어민주당 소속 후보들을 위해 지원 유세를 다녔다. 2016년 11월 박근혜 탄핵 국면에서 상임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대권에 재도전했고 이재명, 최성, 안희정과 겨루어 전체 표수의 과반을 얻어 결선투표 없이 지난 4월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해 더불어민주당 19대 대선 후보가 됐다.

/ 김수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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