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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06.22 16:24:29
  • 최종수정2022.06.22 16:24:29

이정균

시사평론가·전 언론인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입에서 나온 "윤석열 대통령을 비롯해 주요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의 존안자료인 이른바 X파일이 국정원 메인 서버에 남아있다"(2022.6.14. 중앙일보)는 발언에 크게 놀랐다. 그런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게 아니라 그런 자료가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그 입이 놀라웠다. 직전 국정원장이라는 인물의 입에서 자신이 근무하던 조직에 X파일이 보관되어 있다고 언론에 나와 말해도 괜찮은 건지 이해가 안됐다. 국내 최고의 정보기관인 국정원장 출신이 업무 중 취득한 비밀사항을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수준이라면 애초에 국정원장 자격이 없다고 봐야 한다. 국정원 전·현직 직원의 내부고발이나 양심선언이라면 몰라도 전직 국정원장 입을 통해 국민이 들어야 할 정보는 아니다.

*** 국정원장 자격 없어

문재인 전 대통령이 박지원 국정원장을 임명할 때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개 전임 국정원장들은 안보, 외교, 수사 등에 전문성을 가졌거나 대통령의 측근 인사들이었던 데 비해 문재인 대통령의 측근도 아니고 정치 전문가로 소문난 그를 국정원장에 임명하니 이게 무슨 뜻일까 궁금했었다. 더구나 국정원은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제도화 되어 있는데도 말이다. 굳이 연관성을 찾는다면 그가 김대중 대통령 당시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해 북한에 뒷돈을 제공한 대북불법송금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처벌받은 전력이 있으니 혹시나 대북 관계에 노하우가 있어서 그러나 보다 했다. 문재인 정권 내내 대북 저자세로 일관해도 남북대화가 진전되기는 고사하고 북한이 핵실험과 연이은 미사일 발사에다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그를 활용하는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예상은 완전 빗나간 것으로 드러났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을 임명한 이유를 "아침마다 문재인 대통령 비판을 세게 하니까 2년간 제 입을 봉해 버리려고 국정원장으로 보내지 않았는가 생각된다"고 털어놨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내 정치에 개입할 수 없는 국정원장 자리를 국내 정치용으로 이용했다는 실토 아니겠는가. 박지원 전 국정원장은 "대통령의 폭 넓은 인사"를 강조하는 발언이라지만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정보기관 수장의 책무인 '국가와 국민을 위한 한없는 충성과 헌신'의 발현이라고 볼 수 없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언행은 국정원 조직에도, 국가안보에도, 국내 정치에도 전혀 도움 안 되고 오로지 그의 정치적 술수만 발휘됐다. 전직 국정원장으로 많은 인물에 대한 많은 정보를 갖고 있으니 정치적으로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써먹을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나아가 전·현 정권에게 자신의 입을 막으라는 암시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국정원 측에서 박지원 전 원장에게 국정원직원법 위반을 경고하자 유의하겠다며 사과를 했다지만 일단 그가 노린 소기의 목적은 달성된 셈이다.

국정원의 역사는 음양으로 얼룩져 있다. 국정원(국가정보원)의 과거 명칭인 중정(중앙정보부)과 안기부(국가안전기획부)는 공포와 억압의 상징이던 시대가 있었다. 군부권위주의 정권 시절 국민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탄압하는 첨병 역할을 했다. 민주화의 진전과 함께 혹독한 비판을 받으며 조직이 대대적 수술을 당하고 불법, 탈법 행위자는 처벌 받았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국정원장들은 연달아 구속됐다. 국내 정치 불개입은 물론 아예 국내 정보 업무를 경찰에 넘기는 등 조직의 근간이 흔들릴 정도였다.

*** 박지원 수준이 국정원 수준 아니길

북한의 끊임없는 대남 도발로 국가안보가 위기 국면에 처하고 국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될 때마다 국정원을 비롯한 안보 당국에 원성이 쏟아졌다. 간첩을 못 잡는 거냐, 안 잡는 거냐는 조롱도 받았다. 전직 국정원 직원들은 흔들리는 국가안보와 국정원의 처지를 통탄하며 자부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말한다. 현재 국정원의 업무는 대북 정보와 국제 정보에 국한된 것으로 알려졌다. 요즘처럼 전세계가 정보, 통신, 교통, 경제를 포함한 제반 분야에서 복잡다기하게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데 대북 문제와 국제 문제가 어떻게 국내 문제와 분리 가능한지 모르겠으나 개혁된 국정원은 그렇다. 국정원을 국내 정치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만든 성과만으로 안보불안과 국제 영역에서의 미흡을 메울 수는 없다.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 국정원은 필요한 조직이며 더 유능해져야 한다. 과거의 국정원이 잘못된 구습으로 욕먹었다면 현재의 국정원은 무기력한 모습에 신뢰를 얻지 못한다.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가벼운 입이 국정원의 총체적 수준을 드러낸 지표가 아니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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