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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마저도 붙들지 못한 날쎈돌이 의병장 홍우선(洪雨先)

  • 웹출고시간2023.04.24 17:31:25
  • 최종수정2023.04.24 17:31:25

박연수

백두대간연구소 이사장

홍우선(洪雨先)은 '홍아장(亞將:조선시대 각 군사조직의 두 번째 서열을 지칭하던 호칭)'이라 불린다. 경북 상주 용화 출신이며 보은군 내북면 도원리에서 살았다. 의병장 홍아장은 얼마나 몸이 날랬는지 '넉자 다섯자 담을 비호같이 넘어 다녔다'한다. 피체되지 않고 집에서 운명을 달리한 그는 국가의 서훈마저도 붙들지 못한 날쎈돌이 의병장이었다. 도원리 주민들은 '같은 의병장인데 한봉수 의병장이 나이가 두살 더 많아 의병대장이 되었다'는 말을 전한다. 전투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내북면 이원리 비문에는 '1907년 진천 문백에서 왜(倭) 헌병대위 도각선치를 사살하였다. 같은 해 괴산·청원군 일원에서는 60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적 수송대를 급습 물자 및 현금을 탈취하여 주민들에게 분급하는 한편 아군비용에 충당하였다. 다음 해 청주, 전의, 목천, 평택, 여주, 홍성 각지에서의 격전 그리고 문경에서의 최대승첩 등 전후 불가승기의 전투는 의병전사 사실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다'고 적혀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듭된 전투에서 축창과 총포 대결로 인한 중과부적의 형세로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어 잠시 속리산에 후퇴하여 기회를 엿보다가 1936년 6월 22일 52세의 나이에 고향인 도원리에서 비원(悲願)을 안은 채 서거하였다.

현재 내북면 도원리 83에는 손자며느리인 김필순(90)씨가 장남 홍성근(69)씨 부부와 함께 살고 있다. 할머니는 1950년 겨울 18세에 봉황에서 도원리로 시집을 왔다. 당시 시할머니에게 "일본순사들이 팔을 뒤로해 절구통에 묶어 놓고 남편 홍우선을 찾아내라"는 고문을 수차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다. '시할머니는 70세를 넘겨 돌아가셨다. 시할아버지는 독립운동만 하느라 집안을 건사하지 못했다. 땅 한 떼기 선산 하나조차 없어 시할아버지를 마을 뒤 봉우리에 묘소를 썼다. 가난은 되물림 되었다. 그나마 시아버지가 목수일 하면서 생계를 유지했다. 자식은 아들 4명을 두었는데 셋째는 사망하고 셋만 살아있다. 남편 또한 군대 간 아들이 사고 나지 않을까 걱정을 너무 많이 하다 67세에 사망했다." 김씨 할머니는 "가난을 탈피하고자 바느질 품팔아 자식들을 학교에 보냈다. 한병수 의병장이 살아생전 시할아버지를 많이 보고 싶어 한다는 전갈을 받고 청주에서 한봉수의병장과 따님을 몇 차례 만났다. 기력이 쇠한 한봉수 의병장이 시 할아버지의 활약상을 이야기를 해 주어 녹음했으나 지금 자료가 없다"

도원리 마을자랑비에는 '1905년 을사늑약 후 의병장 한봉수(韓鳳洙)의 아장으로 활동한 홍우선(洪雨先) 선생의 의(義)와 충(忠)의 마을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고향인 경북 상주 용화의 국가보훈처 의사유적비(義士遺蹟碑)에 '한일합방의 일제침략을 저지코자 용화에서 의병을 규합하고 무기를 입수(入手)하여 각처의 일본 관헌을 무참히 살해하고 한봉수(韓鳳洙) 의병장과 합세하여 아장으로 종신투쟁 하였음'이라고 적혀있다.

몸이 너무 날래 피체되지 않고 살아남은 홍우선! 중부지역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그었다. 그럼에도 일제의 옥중 기록이 없어 국가 서훈조차 받지 못했다. 마을 뒤 높은 봉우리에서 독립된 대한의 하늘을 묵묵히 바라보며 홍아장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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