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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지금 나를 실험하고 있다. 실험이란 말이 과하다면 암중모색 중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난 지금 러셀식으로 말해서 급여를 받는 노동에서 벗어나 있다. 정확히 아직 급여는 받지만 노동에서 비켜났다. 은퇴를 앞둔 잠정적인 휴식기인 셈이다. 공무원들은 점잖게 '공로 연수'라고 말한다. 우리 공기업은 내가 적립해 놓은 장기 휴가 기간을 마친 후, 곧이어 아웃플레이스먼트 교육 과정을 거친다.

책상 서랍 속의 몇 안 되는 책 가지나 개인 물품을 챙겨 집에 돌아왔을 때, 난 기분이 하도 착잡하여 내 손으로 국순당 생막걸리 한 병을 사서 홀로 마셨다. 몇 년 만에 마시는 술이라 막걸리 한 병을 다 마시지 못할 정도로 핑그르르 돌았고 이내 잠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그 덕에 더는 심란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별 쓸데도 없는 물건들을 챙겨서 집에 온 며칠 후, 난 내 심신을 감싸고 있는 제도화된 흔적을 털어버리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클라크 게이블 같은 멋진 콧수염을 꿈꾸며 난 그날부터 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딱 5일째 되는 날, 콧수염을 다시 밀어버렸다. 아무리 봐도 클라크 게이블의 풍모가 될 리 없었다. 영락없는 노숙자가 된 기분이었다. 코밑이 간질거리고 더워서 견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아내의 타박이 제일 컸다. "별 싱거운 사람 같으니라고, 흉하게."

일단 시간이 많으니 그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방치해 놓았던 농장으로 달려갔다. 무성해진 풀들을 베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예초기를 돌렸다. 풋고추와 호박, 대파를 한 보따리 거두어서 대단한 농사꾼인 양 의기양양하게 돌아왔으나 이내 난 방바닥에 드러누웠다. 소득원이 되지 못하는 시답잖은 텃밭 수준이라도 불볕더위 속에서 하는 농사일을 결코 가볍게 보지 말지니, 도대체 쉬운 일이 하나도 없었다.

집에서 건들거리고 있자니 정말 오랜만에, 평소 친한 선배와 친구들이 나를 만나러 왔고, 안부 전화도 편안하게 오갔다. 이제 더는 비즈니스로 작동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 자동모드가 정지된 시간이 여유롭게 지나갔다. 그 방심과 나른함, 무위가 좋았다. 이럴 때만이 나 자신을 위한 시간인 것만 같았다.

새들이 지저귀는 아침이면 출근 대신 빈둥거리며 천변을 산책하고, 들판의 나무와 풀들 하나하나를 눈으로 훑었다. 느긋하게 몽상도 하고, 배고프면 한술 대강 먹고 틈틈이 낮잠도 잤다. 지난 2주간 평소에 내가 한심스럽게 여겨온 게으름의 목록을 나 스스로 거의 다 실행해 본 것 같다. 더는 필요 없는 알람 시계며, 할 일을 빼곡히 적던 다이어리여, 너의 존재 이유를 모르겠구나. 눈 빠지게 기다리던 퇴근 시간이여, 그런 게 존재했나 싶다.

내 전 존재를 게으름에 방임해도 되는 주체 못할 잉여의 시간 속에서 난 슬금슬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맹자가 2천 년도 전에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 했다는데 이래도 되나 싶었다. 내 머릿속에 무항동 무항생(無恒動 無恒生)이라는 말이 즉각 만들어졌다. '내가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을 터, 움직이지 않는다면 삶도 아니다.'

클라크 게이블처럼 멋진 콧수염을 기르겠다는 치기보다 60여 년의 내 실존에 농축된 생산성과 효율성이라는 현대성에의 매몰, 혹은 고착된 자본주의의 습속을 쉬 떨쳐내지 못하리라는 내 우려가 더 컸다. 게으름을 향한 내 실험을 이제 그만 두기로 했다. 2주만으로도 충분했다. 난 나를 다시 추스르기로 했다.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나,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은 내가 느리거나 게으르게 살 때는 의미 있는 명제이거나 찬양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장미의 순간과 주목(朱木)의 순간은 같다"라고 한 엘리엇의 시구만큼이나 모호한 문제였고, 내가 다시 재해석해야 할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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