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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피난을 가자. 여기 있다간 다 죽겠어" 아내는 결연하게 말하고 주섬주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래 어디든 당장 떠나자, 애들이 큰일 나겠다" 나도 주저 없이 동의했다.

그날은 집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집안에선 더운 열기로 숨쉬기도 어려웠고 방안에 발을 들여놓기조차 힘들었다.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

그해는 유달리 장마가 짧았고 강수량도 턱없이 모자랐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고 열기를 가득 품은 공기가 도시 안에 내내 머물렀다. 태양은 더욱 뜨겁게 이글거렸고 아스팔트는 끈적이며 녹아내렸다.

벌써 수백 명의 사람들이 더위 때문에 죽었다고 뉴스는 전했다. 김일성의 사망으로 생필품의 사재기 열풍이 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은주는 연일 37도, 38도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김일성의 저주라고도 했다.

텐트와, 이부자리, 몇 점의 옷가지를 챙겨서 부랴부랴 도착한 피난처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그나마 빈자리를 차지한 우리는 안도의 숨을 내쉴 수가 있었다.

강원도 영월의 주천계곡이 우리가 마련한 피난처였다. 도착하자마자 우린 계곡물로 뛰어들었다. 텐트를 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 도심에 남은 사람들이 걱정될 정도로 계곡의 밤바람은 서늘하기만 했다.

하룻밤사이에 확 변한 생활환경이 애들뿐 아니라 나까지 들뜨게 했다. 눈뜨자마자 계곡물로 달려가서 수영을 했다. 키 큰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아침햇살이 눈부셨고, 산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에 마냥 즐거웠다.

문제는 내가 휴가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계곡에서 회사까지의 먼 거리를 차를 몰고 출퇴근을 했다. 매일 퇴근길에 시장을 봐서 먹거리들을 피난처로 나르는 일이 내 주된 일과가 되었다.

내가 준비하는 식재료가 그날 식단을 결정했다. 삼겹살도 구워먹고, 삼계탕도 해먹고, 어떤 날은 부침개, 어떤 날은 계란찜, 매일 메뉴를 달리해서 야외에서 해먹는 저녁식사에 애들은 신나했다.

막내는 저녁마다 동요를 불러대었고, 밤이 되면 우리는 흐르는 계곡물소리를 들으며 까만 하늘에 반짝이는 푸른 별들을 바라봤다.

낮에 회사에서 맞는 찜통더위쯤은 별거 아니었다. 퇴근하자마자 계곡물에 풍덩 뛰어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시원해지는 듯 했다.

그렇게 생활한지 20일이 지났다. 그동안 제대로 된 비는 좀처럼 내리지 않았다.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야영생활을 계획했던 우리는 철수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드디어 태풍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친 비바람에 키 큰 나뭇가지가 휘청거렸고 텐트가 요동쳤다.

20박 21일의 야영생활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1994년 여름 온열질환으로 서울에서만 1천여명이 죽고, 전국적으로 3천300여명이나 사망했다고 하니 가히 살인적인 더위였던 건 분명했다.

때 이른 더위로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다고 했다. 그해 여름을 떠올리며 큰 아들에게 물었다. "그때 기억나? 20일 동안 야영하던 강원도 계곡? 참 대단했지" "20일이나? 아니 기억나지 않는데요, 우리가 언제 그랬었나?"라며 아들은 멀뚱거렸다.

나와 아내는 서로를 바라보며 허허 웃었다. 똑 같은 경험을 해도 부모와 자식 간은 이렇게 달랐다. 사는 게 다 그럴 터였다. 그래도 그해 추억들이 내 가슴에는 고스란히 남았다. 하여 난 그 맹렬하게 뜨겁던 여름조차 그립고 소중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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