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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강이 요란한 물소리를 내며 흐르기 시작했다. 강을 거슬러 낮게 속삭이던 바람도 제법 그 호흡이 가빠졌고, 오래 기다린 시간이 한꺼번에 몰려오듯 여름의 강물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얼마나 기다려온 비인지. 하지만 대지가 갈증을 채우기도 전에 이내 비는 그쳤다. 비는 더 이상의 기대와 만족을 허락지 않은 채 매정하게 퇴각했다. 이제 난 콘크리트와 철근 구조물들이 내뿜는 금속성의 열기 속으로 다시 걸어 나가야 할 것이다.

비 그친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비에 대한 간절한 갈망이 비에 대한 기다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정체불명의 막연한 느낌은 무엇일까. 그것은 비가 그친 후에 강에서 홀연 피어오르는 물안개처럼 아련한 추억이 불러오는 그리움 같은 거였고, 추억이라는 시간의 단층 속에 겹겹이 포개어진 사랑의 느낌이었다.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를 가만히 읊조려 보니 갑자기 몰려오는 그리움으로 가슴이 메어왔다.

내 어릴 때의 여름 한 낮, 마루에 앉아 앞마당을 내려다보면 마당 한가운데 있는 우물 옆으로 고추며 가지며, 오이, 토마토가 주렁주렁 열린 텃밭이 있었다. 텃밭 가장자리로 앙증맞게 피어있던 채송화며 봉숭아가 그 수줍은 색깔을 반짝이며 흐드러졌었다.

아침 일찍 뒷산 중턱의 밭으로 나간 어머니는 돌아올 줄 몰랐다. 난 마룻바닥에서 빈둥거리며 이제나 저제나 어머니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후드득거리며 굵은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온 사위가 어둑해지며 코끝으로 흙 내음이 진하게 전해졌고 그 흙냄새만큼이나 내 걱정이 짙어져갔다.

무작정 우산 하나를 들고 달려간 산은 깊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우거진 아카시아나무숲을 지나 밭을 향해 오르는 산길, 길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나뭇잎이 비와 뒤섞인 강한 바람에 춤을 추었다. 좁은 산길을 따라 흘러내리는 물줄기에 신발은 벗겨졌고 칡넝쿨에 걸려 난 자꾸만 넘어졌다. 무릎과 팔뚝의 생채기에서 나온 핏물이 비와 함께 흘러내렸다.

시간을 가늠치도 못한 채 겨우 당도한 언덕배기 밭에는 어머니가 비를 흠뻑 맞으며 김매기를 하고 있었다. 난 그때 와락 울었던가. 무서움과 안도감이 뒤섞여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복잡했으나 난 그때 어머니 품에 안겨 참으로 행복했다.

다 찢어지고 살이 부러진 우산을 들고 어머니와 함께 내려오던 산길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비를 맞으면서도 우물물을 길어 깔깔대며 몸을 씻던 그 여름의 시간. 그날 밤 초롱초롱한 별들이 마당 가득 쏟아졌고, 개구리가 밤늦도록 큰소리로 울었다.

내가 기다린 것은 대지를 적실 한줌의 비였으나, 내가 진정 그리워한 것은 잊어버린 그 여름날의 시간이었고 사랑의 기억으로 남은 하나의 우산이었다.

내가 오랫동안 갈증으로 목말라한 것은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비에 젖을 수 없다는 속절없음과 돌이킬 수 없는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던 것이다.

비가 내릴 때면 시간이 빗방울이 되어 훌훌 안개처럼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난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더 자주, 더 많이 비에 젖었으면 한다. 하여 난 앞으로 자꾸만 안부를 물을지도 모르겠다. "거기 비가 오나요?" 아니면 "혹시 우산은 있나요?"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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