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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특집]구국의 횃불 '제천 의병'

"제천을 중심으로 의병천하를 만들다"
유인석, 이강년 등 일제 항거의 길 제시
현재에 맞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발전 필요

  • 웹출고시간2019.02.20 20:34:20
  • 최종수정2019.02.20 20:34:20

고암동 순국선열묘역.

[충북일보] 1910년 8월부터 1945년 8월까지 36년간에 걸쳐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시기를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라 한다.

앞선 1905~10년에는 비록 보호국체제 아래에서나마 대한제국의 주권이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배기는 1910년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시기에 대한민국의 근대 역사 중 가장 중요한 한 사건인 3.1만세운동이 일어났으며 올해 그 100주년을 맞았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과 폭거에 저항하고자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 이어졌으며 그중 의병은 가장 적극적인 형태의 저항이었음에 분명하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대한민국의 의병과 특히 충북·강원·경상북도에서 중추적인 의병활동으로 일제에 맞서 싸운 제천의병에 대해 조명해보고자 한다.
ⓒ 제천의병전시관
◇대한제국의 의병

△초기 의병운동

초기 의병운동(을미의병 1895~1904)은 민중운동(영학당, 활빈당, 만민공동회)으로 일제 침략세력에 맞서는 민족적 저항 운동이나 봉건 지배층에 맞서는 계급적 저항 운동은 아니었다.

민비 시해사건과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에 촉발된 후 유생과 평민간의 신분적 대립, 국왕의 아관파천단행으로 나타난 대부분의 의병부대는 국왕의 회유에 의해 해산되고 말았다.

△후기 의병전쟁(=정미의병: 1905-1909)

후기 의병(정미의병 1905~1909)은 척사에서 국권회복으로 진전해 본격적인 반일운동으로 이어지며 국민적인 독립전쟁으로 발전했다.

1905년 이후 활빈당투쟁, 화적 등 민중세력의 진출로 반일 의병전쟁으로 투쟁 형태 변모하며 의병 전쟁의 성격을 띠게 됐다.

특히 1906년 이후 분산적인 소규모 의병 활동이 통합되며 큰 대오를 형성하고 광범위한 계층이 참여하며 봉건 유생 중심에서 탈피했으며 투쟁 목표도 국권회복, 구국항전으로 발전했다.

특히 1907년 군대 해산 이후로 무장력이 한층 강화되고 평민출신 의병장 대두되고 1915년 이후 만주, 연해주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며 1920년대 만주 등지의 초기 항일 독립군 무장 항쟁투쟁으로 이어졌다.
ⓒ 제천의병전시관
△항일의병 전쟁의 평가

갑오농민전쟁과 대한제국기 민중운동을 계승하며 전개된 국권회복 운동으로 일본의 우세한 무장력과 의병내부의 신분적 계급적 대립, 사상적 한계, 분산적 투쟁으로 실 패를 맞봤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화 정책에 타격을 주고 병합기간 지연은 물론 민족해방운동이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제천의병의 역사적 의의와 계승·발전

△제천의병의 의의

운강 이강년 선생 전적추모비.

제천의병은 당시 제천을 비롯한 사군(제천, 청풍, 단양, 영춘)지역에 지리적, 학문적, 혈연적 연고의 기반을 둔 한말 의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시기에 따라 영남, 강원, 경기지역, 나아가서는 서북과 해외에까지 확대되기도 했다.

그러나 항상 그 근거지는 제천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호좌의진(湖左義陳)과 이강년(李康秊)에 관한 핵심적 자료를 남겨둔 박정수(朴貞洙)도 "제천은 의병의 처음이요 마지막인 고장으로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선 장병이 제일 많았다"고 단언한 것이다.

또한 한말의 제천의병은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서 유중교(柳重敎)와 유인석(柳麟錫)이 거주하며 제자를 양성한 제천의 장담(長潭)(제천시 봉양읍 공전리)마을이 의병봉기의 터전이 됐다.

지평의병이 패하고 영월로 후퇴하자 유인석이 요동(遼東)행을 포기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돼 의진을 수습하고 의병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제천이다.

※ 참고 : 제천의병전시관 홈페이지 '제천의병의 의의'

(좌)의병 포신, (우)의병들이 사용하던 지도.

△제천의병의 태동과 초·중기 활동

을미년 음력 11월에 강요된 단발령은 문화적 자존심을 짓밟는 폭력적 조치로 분노를 터뜨리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머리카락 하나까지 부모가 주신 것이라면서 존중하던 이들에게 단발을 강행하니 거리에는 사람이 끊어질 지경이었다.

당시 제천의 장담에는 화서학파의 계보를 이은 유중교가 이주한 1889년 이래 많은 선비가 모여들어 강학에 열중하고 있었다.

의암 유인석.

유중교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들은 유인석을 중심으로 척사의 정신을 천명하고 있었다.

그들은 단발이 강행되자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논의했고 그 자리에서 당시를 '중화가 오랑캐가 되고 사람이 짐승이 되는 극한상황'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것과 국외에 망명해 도맥(道脈)을 계승하는 것, 그리고 조용히 자결하는 것 등의 방안이 제시됐다.

유인석은 망명하고자 했으나 일부의 소장파 문인사우(門人士友)는 의병봉기의 길을 선택했다.

의병장 유인석 심의.

이후 지휘부는 효과적인 의병 항쟁을 위해서는 권위 있는 지휘부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유인석에게 대장을 맡아줄 것을 간청했다.

유인석은 모친상과 능력부족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결국 영월에서 호좌의진, 즉 제천의병의 대장의 자리에 올라 의병봉기의 명분을 팔도에 고했으니 을미년 12월 20일(1896년 2월7일)이었다.

이에 따라 제천의병의 충주성 장악을 필두로 제천 지역의 10개 남짓한 인근 고을의 지방관을 쫓아내거나 베어 버리고 수성장을 임명해 광대한 해방구를 건설했다.

그뿐만 아니라 영남 지역에 서상렬 부대를 내려 보내 여러 고을 의병을 결속시켜 항일 전선에 서게했으니 이로써 제천의병은 그 이름을 전국에 떨치게 됐다.

의암유인석 의병대장 추모제(2015년).

△중·후기 제천의병의 활약

다양한 일제와의 전투를 벌이던 유인석은 제천을 상실한 후 남은 병력을 이끌고 인근의 군현을 전전하며 관군과 부딪쳤지만 한번 기울어진 형세는 만회할 길이 없었다.

결국 유인석은 강원도 정선에서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의병봉기의 정당성을 천명하고 서행 길에 올랐다.

압록강을 건너 의병을 해산한 유인석은 도맥을 계승하고 복수의 날을 준비하는 새로운 과업에 몰두했다.

또 의병에 가담했던 제천의 의병론자들은 스승의 문집을 간행하며 결속을 다지고 때로는 위정척사적 성향을 강하게 띠는 향약운동을 통해, 또는 비밀 결사체를 구성하며 재기를 노렸다.

그 후 강제된 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은 잠재하고 있던 의병들이 일시에 들고 있어서는 계기가 됐고 을미의병 당시 유격장이었던 이강년의 봉기가 대표적이다.

해산된 원주 진위대에서 무기를 받은 수많은 의병장들과 해산병 출신의 의병들도 일시에 제천으로 모여들며 다시 제천은 의병천하가 됐다.

이소응 선생 창의 숭모비.

일본군은 제천에 불을 질러 의병의 근거지를 완전히 초토화하고자 했으나 이후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강년은 이 일대를 근거지로 활발한 의병활동을 벌여나갔다.

그의 활동무대는 사군(四郡)은 물론이요, 영월·원주 등 강원도 영서 지역, 그리고 영남 북부지역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것으로 한때는 경기도 양주까지 진출해 서울 입성을 노리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토벌이 심해지면서 점차 수세에 몰리며 이강년은 의병활동이 활발해지고 있던 호남 쪽으로 나아갈 꿈을 안고 제천 일대로 이동했다.

이강년은 병력을 정비하려고 다시 제천 쪽으로 이동했다가 1908년 6월 4일 청풍 금수산에서 일본군 및 순사대의 기습을 받아 체포돼 결국 순국했다.

그러나 이강년의 순국은 제천의병의 끝이 아니었으니 이강년과 연대하며 항일활동을 해나가던 수많은 의병부대가 있었으며 동지였던 김상태도 제천의병의 서슬 푸른 깃발을 나라가 망한 이후까지도 놓지 않았다.

※ 참고 : 제천의병전시관 홈페이지

제천의병전시관.

△제천의병의 계승과 발전

제천의병의 저항 정신은 그들이 순국한 이후에도 땅에 묻히지 않았다.

일찍이 제천의병의 지도자 유인석에 의해 시도됐듯이 국외에서의 무장투쟁으로 계승 발전되어 나갔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제천의병 정신을 위해 제천시는 매년 10월 열리는 의병제는 물론 다양한 방법으로 의병정신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숭고한 의병정신을 시민정신의 기본 지표로 승화시키고 제천의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고자하는 것은 기본 목적이다.

다만 이 같은 의병정신의 계승과 발전이 현재의 젊은 세대에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는 방법적인 문제가 지적돼 온 것도 사실이다.

창의123주년 의병제.

이에 따라 시는 지난해부터 의암 류인석 선생의 영정이 봉안된 자양영당에서 고유제 봉행 및 혼불채화와 홍사구 열사 등 의병들의 묘소가 있는 고암동 소재 순국선열 묘역에서의 위령묘제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 다가가기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제천 의병의 역사를 공연으로 재구성한 뮤지컬과 제천의병은 물론 강제 이주라는 아픔의 역사를 겪은 선조들을 재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제작, 상영이 그것이다.

시 관계자는 "기존의 의식행사 위주에서 벗어나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기 위해 뮤지컬, 추모공연 등 다양한 형식의 프로그램을 도입했다"며 "제천시민은 물론 나아가 전 국민들이 제천 의병정신에 대해 다가가기 쉽도록 친근하고도 다양한 프로그램 마련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지역 역사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일제강점기를 겪은 대한민국은 의병은 물론, 강제이주민, 위안부 등 절대적인 아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며 "쉽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의 행적과 의미를 더욱 계승·발전시켜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제천 / 이형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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