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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자

수필가

황금 들녘이 며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추수가 끝난 후라서 휑한 논바닥에는 공룡 알 모양의 흰 둥근 물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고향 집 마당 가에 심어놓은 배추를 묶어야 할 볏짚을 찾아 나서보아도 구할 수가 없다. 궁금하여 옆집 아저씨에게 논바닥에 있는 거대한 공룡 알 모양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것은 볏짚을 발효시키기 위해서 비닐로 단단히 포장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숙성된 사료는 숙성되지 않은 목초나 볏짚보다 훨씬 많은 영양분과 좋은 성분을 포함하고 있어서 소나 양 등의 가축에게는 최고의 먹잇감이라 한다. 그래서 볏짚을 축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가서 귀한 물건이 되었다. 그러니 볏짚이 필요하면 추수하기 전에 미리 얘기할 걸 그랬다고 일러 주었다. 논농사를 지어 지천으로 쌓인 볏짚을 땔감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을 줄은 미처 생각 못 했던 일이다.

생각해보면 볏짚의 활용도가 상당히 컸다고 생각된다. 볏짚을 작두로 썰어 가마솥에 넣고 푹푹 삶아 소 구시통에 넣어주면 맛나게 먹던 왕방울 소가 그립다. 외양간에 깔아준 볏짚은 소의 분뇨와 소의 발에 밟히고 섞여 모아두었다가 논과 밭의 밑거름이 되어 화학비료가 아닌 자연 친화적인 유기농 퇴비로 쓰였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할아버지는 마당 가에 노적가리처럼 쌓아 둔 볏짚을 가져다 외양간 앞에서 깔끔하고 가지런하게 추렸다. 추린 볏단을 사랑방 구석에 세워놓고 짬이 날 때마다 굵고 가는 새끼를 열심히 꽜다. 꼰 새끼줄을 여러 타래 모아두었다가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다 만들어내셨다. 솜씨 좋은 할아버지는 굵은 새끼줄로는 큰 직사각형의 멍석을 만들어 알곡식이나 나물을 널어 말리는 용도로 쓰고 가마니를 짜서 곡식을 담아 보관했다. 가늘게 꼰 새끼줄로는 동그랗게 맷방석을 만들어 술빚을 고두밥과 누룩을 버무릴 때나 곡식을 탈 때 맷돌 밑에 깔아놓았다. 둥구미는 곡식을 담아두거나 옮길 때 사용하고, 삼태기는 곡식을 퍼 담아 옮길 때 쓰였다. 거적때기나 덕석을 만들어 소의 등에 덮어 주기도 했다. 비 오는 날 들일 나갈 때 쓰는 도롱이와 닭 둥우리며 멍멍이 집도 만들었다. 또 짚신을 만들어 밑바닥이 다 닳을 때까지 신고 다니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이렇게 볏짚으로 생활에 필요한 여러 종류의 도구를 손색없이 만드셨던 할아버지야말로 훌륭한 예술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왼손으로 꼰 새끼줄에 숯, 고추, 청솔가지를 끼워 삽작 기둥에 금줄을 쳐 놓아 새 생명의 탄생을 축하해주던 귀한 새끼줄이다. 읍내 나가 생선을 사 올 때도 지푸라기로 생선 중간을 질끈 묶는 끈으로 쓰였다. 우리네 먹거리 중에서 메주 띄울 때나 청국장을 발효시킬 때도 볏짚이 꼭 필요하다.

매년 단오 때가 되면 동네 한가운데 있는 느티나무 가지에 새끼줄로 굵게 엮은 밧줄을 매 놓았던 그네도 있다. 밤에는 어른들이 타고 낮에는 아이들이 즐겨 타는 좋은 놀이 기구였다.

새마을 운동으로 지붕 개량이 되기 전에는 농촌의 집들은 대부분 초가집이었다. 그 초가집의 지붕을 덮기 위해 해마다 입동이 지나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볏짚으로 이엉 엮기에 바빴다. 이엉을 엮어가며 두루마리로 말아 마당 가득하게 세워놓고 묵은 이엉은 걷어내고 새 이엉을 지붕 위로 올려 아래쪽부터 덮어나갔다. 위까지 다 덮으면 볏짚으로 길게 틀어놓은 용마름을 올려 용마루와 담장 위를 덮고 난 후 김칫광을 해 이기도 했다. 볏짚으로 새 단장 이 된 초가집을 바라만 봐도 훈훈한 감이 돌았다. 이런 일은 연례행사처럼 마을 사람들 간에 서로 품앗이로 이루어졌던 아름다운 일이다.

예술작품으로 승화된 볏짚의 무한변신이야말로 참으로 소중하고 위대하다. 볏짚은 생활에 두루두루 필요하고 귀중한 소재로 쓰이고 있어서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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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날 특집 인터뷰 - 윤희근 경찰청장

[충북일보] 충북 청주 출신 윤희근 23대 경찰청장은 신비스러운 인물이다. 윤석열 정부 이전만 해도 여러 간부 경찰 중 한명에 불과했다. 서울경찰청 정보1과장(총경)실에서 만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게 불과 5년 전 일이다. 이제는 내년 4월 총선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취임 1년을 맞았다. 더욱이 21일이 경찰의 날이다. 소회는. "경찰청장으로서 두 번째 맞는 경찰의 날인데, 작년과 달리 지난 1년간 많은 일이 있었기에 감회가 남다르다. 그간 국민체감약속 1·2호로 '악성사기', '마약범죄' 척결을 천명하여 국민을 근심케 했던 범죄를 신속히 해결하고, '화물연대 집단운송거부', '건설현장 불법행위' 같은 관행적 불법행위에 원칙에 따른 엄정한 대응으로 법질서를 확립하는 등 각 분야에서 의미있는 변화가 만들어졌다. 내부적으로는 △공안직 수준 기본급 △복수직급제 등 숙원과제를 해결하며 여느 선진국과 같이 경찰 업무의 특수성과 가치를 인정받는 전환점을 만들었다는데 보람을 느낀다. 다만 이태원 참사, 흉기난동 등 국민의 소중한 생명이 희생된 안타까운 사건들도 있었기에 아쉬움이 남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맞게 된 일흔여덟 번째 경찰의 날인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