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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수필가

돌연 퇴각한 여름을 생각하곤 어리둥절해졌다. 어두움이 빨리도 다가왔다.

계절이 돌변하는 것을 길어진 어둠으로 감지했다.

빗속에 어두움이 다가오는 것을 빈 사무실에서 홀로 바라보았다. 6시의 어둠이 7시의 어둠으로 인계하고, 9시의 어둠이 8시의 어둠을 접수했다. 시간이 누적되면서 어두움의 밀도는 깊어졌다.

해변가의 도시들이 광풍으로 몸살을 앓을 때 내륙의 밤은 고요했다. 이곳의 태풍은 어둠속을 슬며시 스쳐가는 듯 했다. 내 비상근무도 그래서 고요했다.

지난여름은 무자비한 폭염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 비 그치면 지천으로 푸르렀던 한 해살이 풀들이 그 목숨을 떨구고, 수백 년의 생명을 간직한 수목의 잎들도 탈색한 잎들을 떨어뜨릴 터였다. 온몸으로 뜨거움을 견디던 대지의 흙들과 돌들도 더 헐거워질 거였다.

며칠 전 들렀던 공주의 석장리 박물관과 백제의 공산성을 떠올렸다.

박물관 앞으로 아름다운 금강의 물결이 소리 없이 흘렀다. 수만년 전 구석기인들도 강변 억새풀 너머로 그 강물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가족의 입으로 한 끼의 양식을 넣어주기 위해 사내들은 돌도끼를 갈고 돌망치를 휘두르며 산과 들로 뛰어 다녔을 것이고, 아낙들은 불을 지피고 자식들에게 퉁퉁 불은 젖을 물렸을 것이다.

강물은 그대로인데 수만년 전 그들은 강물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을 뿐이다.

패망한 왕조의 성곽주변은 사람들로 붐볐다. 몰락한 왕조의 후손들은 한 때 화려했던 선조들의 꿈을 다시 꾸고 싶어 했다. 보다 큰 영화를, 보다 많은 행복을 꿈꾸며 그들은 웃고 축제를 열었다.

천 오백년 전의 융성하고 찬란했던 시절은 성(城)의 돌과 거대한 무덤과 푸른 하늘로만 남아 그들의 꿈을 갈망하게 했다.

밤 10시의 어둠이 짙어지면서 내 몸의 허기를 느꼈다. 석장리의 구석기시대 수만년 전부터, 백제의 천 오백년 전까지 이어온 허기를 느끼는 것만 같았다.

인간의 허기는 영원토록 미완으로 남아있을 주제일 터였다.

나는 오랫동안 빗속의 어둠을 바라보았고, 정말 오랜만에 예민해진 촉수를 세워서 아득히 먼 곳으로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난 수만년 전 황량한 중앙아시아의 광활한 초원을 거쳐 온 우리 조상들의 시간을 함께 느꼈다. 순전히 어둠 탓이고, 홀로였기 때문이고, 빗속으로, 바람 속에 묻혀오는 가을 탓이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으나 그 시간은 함께 흘러 남았다. 시간 속에 흘러든 사람들의 아픔, 방황, 행복, 사랑, 번민, 후회, 미련, 추억, 그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 고스란히 머물러 있음을 난 이 가을의 입구, 어둠의 길목에서 목도한 것이다.

내 한 생을 거쳐 간 가을이 고작 50여 번이란 생각만으로도, 구석기시대부터 백제를 거쳐 내 몸을 횡단한 수천, 수만 번의 가을을 떠올리면서 난 이 계절의 신성(神聖)이 저절로 느껴졌다.

익숙한 허기를 느끼면서 난 내게 펼쳐진 이 시간의 지복을 받아들였다. 비에 젖어 번들거리는 색 바랜 나뭇잎들이 지난 계절의 진초록을 이겨냈음을 보여주었다.

어두워진다는 것, 무르익고 난 후 떨어진다는 것, 잊혀진다는 것, 잃어버린다는 것, 추락한다는 것의 근원적인 답변은 이 가을만이 주는 열매였다.

가을 속에 깃든 어둠이 나를 익명에서 실명으로 구조해 주었다. 열기를 피해 이리저리 피해 다니던 여름과 빛 속에서 잠시 나를 잃었고 돌보지 못했었다. 이 가을의 어둠이 날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았다.

가을은 아득한 근원을 찾아가는 시간, 견딜 수 없는 허기와 같은 일상의 아픔쯤은 이 유구한 시간을 더듬는 동안 아무것도 아님을 말해주었다.

이 가을은 살아가는 일이 혼절할 것 같이 열에 들끓는 사랑이 아니라 뚝배기 같이 은은한 우정에 더 가까움을, 그래서 진부하고 조촐한 것의 정겨움을,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일깨웠다.

난 한층 순도 높아 가벼워진 가을 속으로 걸어 나오면서 중얼거렸다. 안녕! 뜨거웠던 지난 계절아. 초록의 녹음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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