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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11.04 15:05:02
  • 최종수정2024.11.04 15:05:02

정범

시인

조용한 가을밤이다. 너무 조용해서 눈물이라도 떨어뜨려야 할 것 같은 밤이다. 숲에 있는 나무들이 눈물 대신 붉은 잎새를 떨어뜨린다. 허공을 가르며 한 장의 잎새가 공중에서 조용히 대지로 내려앉는다. 바람이 없어 그 움직임은 느려 보인다. 얼마나 될까. 찰나의 순간, 대지로 가라앉는 저 나뭇잎의 순수 무게. 인간의 영혼도 무게를 잴 수가 있다는데 저 잎의 영혼도 무게가 있을까.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뿌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구비구비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 전문, 한용운

시는 움직이지 않는 세계와 움직이는 세계, 정(靜)과 동(動) 두 개의 세계를 표현한다. 정의 세계는 무한 불변의 세계를 뜻하며 동의 세계는 창조 발전의 세계를 의미한다. 두 세계는 대립하고 화해하며 사랑의 세계로 귀결한다.

떨어지는 오동잎은 죽음의 이미지를 갖는다. 잎의 낙하는 소멸을 뜻한다. 하지만 이 시의 죽음은 능동적인 의미의 죽음이며 "수직의 파문"을 일으키는 힘을 가진 죽음이다. 말라비틀어진 채 떨어지는 한 장의 나뭇잎이 허공에 파문을 낼 수 있는 까닭은 소멸의 양상 역시 "누구"로 명명된 거대한 존재에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존재의 크나큰 힘에 따라 부서지고 깨지고 목숨이 끊어진 생명, 즉 "타고난 재"는 "다시 기름이" 되어 부활한다. 죽음으로부터 재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화자를 "그칠 줄 모르고 타는" 불로 만들며 '영원한 존재'의 밤을 지키는 "등불"이 되게 한다.

실상 시 속의 화자는 계속 질문을 하지만 궁극적인 대답은 시 제목대로 "알 수 없어요"다. 무한한 우주에서 먼지 부스러기에 불과한 짧은 삶을 살다가 가는 유한자인 인간이 그 시간 동안 정적인 세계의 깊이를 모두 알아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리라. 다만 짧은 생애 가운데에서도 자신만의 '불'을 밝히며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지향점이 되리라. 존재에 대한 지향은 인간의 생명 의식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삶의 수직적 원동력인 '불'은 미지의 시간을 이겨 나가는 힘인 '사랑'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 내부의 불은 우주의 고아처럼 던져진 인간에게 불가능하게 생각되는 일을 상상하게 하며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질료로서 무한 원천의 사랑이 발현할 수 있도록 돕는다.

바람이 슬며시 분다. 붉은 잎 몇 장이 떨어져 내린다. 지상에 발을 내린 저 이파리는 부서지고 흐트러지고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될 것이다. 눈발이 지고 비가 내린 후, 거름이 된 낙엽은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듯이 물속에 스미어 자기가 떨어져 나왔던 뿌리 안으로 다시 들어가리라. 후대를 생각하는 본능적인 사랑은 우주적인 원리다.

또 하나의 잎이 진다. 떨어지는 저 잎새 한 장에도 영혼이 있다. 그 영혼의 무게는 우주를 받치고 있는 무게와 같다. 가을이 자기 스스로 깊어 간다. 짧은 상념 끝에 다다른 모과나무 가지 끝에 노란빛의 열매가 매달려 별처럼 빛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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