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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갑자기 도시가 비어버린 느낌이 든다. 텅텅 빈 도시, 거리를 오가던 사람들 수가 부쩍 줄었다. 태양 빛이 서쪽으로 길게 늘어지는 저녁, 여전히 뜨거운 빛은 집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린다. 더위를 피해 사람들은 어디로 떠난 걸까. 문득 피아노 앞에 선 채, 추억의 변산반도 앞바다를 떠올린다. 지금도 그 모래사장엔 많은 이들이 무더움을 벗고 휴가를 즐기고 있겠지. 푸르른 차가움, 피부를 적시는 물의 감촉을 마음으로 느끼며 잠시 몽상에 잠긴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나는 바다로 가서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 들었다.

전봉건, 「피아노」전문 (전봉건 시전집, 문학동네 2008)

피아노를 소재로 한 시다. 공감각적인 세계를 그리고 있는 이 시는 시인의 대표작이며 매우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독자의 상상력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 있지만, 실상 난해한 작품이 아니다. 시는 여자가 치는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화자가 느끼는 무한 상상의 감각을 이야기한다.

여자가 피아노를 치고 화자는 그 음과 리듬을 들으며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무수히 "쏟아지는" 걸 본다.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이라는 표현은 템포가 매우 빠른 곡임을 나타낸다. 어쩌면 원곡을 빠르게 변주한 곡일는지도 모른다. 화자가 '피아노 음'을 '물고기'로 감지한 건 '소리'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물고기'라는 시각적 이미지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는 공감각적이며 매우 초현실적인 '그림' 혹은 '영상'의 한 장면처럼 느껴진다. 화자의 공간적인 배경은 '연주회장'일 거란 생각이 드는데 2연에 와서 공간은 '바다'로 바뀐다. 화자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상상의 바다로 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그는 "가장 신나게 시퍼런 파도의 칼날 하나를 집어"든다. 밀려오는 파도 자락을 "칼날"이라고 표현한 건 매우 독창적이다. 바다의 '물결'과 부서지는 '물거품'을 결합하며 만든 날 것의 이미지다. '물고기'의 이미지에서 또다시 연상되어 나온 듯한 이'칼날'의 은빛 색감은 아주 생생하다. 1연에서 화자는 피아니스트의 연주를 듣지만 2연에서는 바다로 가서 파도의 칼날을 잡는다. 이는 화자가 음악에 매료되어 완전히 동화되었다는 걸 의미한다. 즉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던 화자는 깊은 심취에 빠져 피아노 연주의 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시의 주제는 피아노 선율에 의한 감동적 환상이다. 피아노와 물고기와 바다, 어울리지 않는 이 몇 개의 대상은 동적인 존재이며 소리를 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시인의 영감 속에서 이 이미지들은 결합하여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한다. 놀랍지 않은가, 신선한 율동을 가진 시인의 몽상은.

바다로 간 사람들은 '파도 피아노'가 치는 맑은 음을 듣고 있을까. 깨지며 튀어 오르는 선율에 따라 닫혀있던 마음의 감각을 열며 자신의 소리를 따라 뱉어낼까. 피아노 앞에 앉는다. 서툴게 건반을 두드리며 공중에 튀어 오르는 물고기와 사람들의 탄성과 철석이며 밀려오는 파도의 하얀 포말을 그린다. 몽상 끝에 다다른 바다의 깊은 음이 낡은 피아노의 울림에 부딪혀 새로운 꿈을 빚는다. 갑자기 텅 빈 도시에 파란 물결이 밀려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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