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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11.27 14:36:31
  • 최종수정2022.11.27 14:36:30

김정범

시인

어둠 속에서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깨어 불을 켠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미묘하고 정밀하다. 조용한 시간엔 몸에서 나는 미세한 소리까지 잘 감지한다. 양쪽 귀를 막으면 혈액이 흘러가는 소리와 심장이 펌프질하는 소리가 들리고, 손을 떼면 먼 별에서 날아온 듯한 불규칙한 음과 윙윙 울리는 기계음이 뒤섞이며 기이한 소리가 진동한다. 무슨 전파일까. 내가 나에게 하는 소리일까. 파란 시집이 눈에 띈다. 젖은 풍경이 열리며 사물들이 눈을 뜬다. 하얀 쪽 가운데서 중음이 새어 나온다. 시인은 어떤 소리를 들었을까.

무리한 약속을 한 것 같은 후회가

내 귀에 집을 짓고 가로수처럼 박혀 있다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기호들이 움직인다

가만히 앉아있거나 혼자서 멍 때릴 때면

밤낮으로 찾아드는 불온한 새 한 마리

부르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날아든다

귓가엔 사무치는 소리 하나 있다지만

자꾸만 울어대는 뒤틀어진 기호들이

둥그런 달팽이관 속 이곳저곳 떠돈다

─ 이상호, 「이명 耳鳴」 전문, (시조집 풍경, 고요아침 2021)

시를 읽으며 불안감을 느낀다. 뭘까, 이 심리의 근원은. 화자는 '무리한 약속'을 하고 '후회'를 한다. 그게 어떤 약속인지 구체적인 건 알 수 없다. 아마도 어려워도 꼭 지켜야 하는 약속 아닐까. 살면서 우리는 무수한 약속을 한다. 타인 혹은 자기와의 약속이다. 어떤 약속은 화자처럼 괜히 했나 하는 후회감이 들기도 한다. 약속에 따르는 실질적 혹은 도덕적 책임 때문이다. 시에서 화자의 약속은 타인과의 약속이라기보다는 자신 내면과의 약속이다. '내 귀에 집을 짓고 가로수처럼 박혀 있는' 신념과 같은 오랜 약속이기 때문이다. '명명할 수 없는 기호'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화자는 귓속으로 날아드는 '불온한 새 한 마리'를 느낀다. '부르지 않았는데 날아오는 새'는 외부에서 온 게 아니라 영혼의 내부에서 날아든 것이다. '불온'이란 어휘는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맞선'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화자가 지켜야 할 가치와 신념은 어떤 부당한 권력 혹은 체제와 대립하는 관계에 놓여 있다. 갈구의 '사무치는 소리'는 '달팽이관' 안에서는 '뒤틀어진 기호'로 '이곳저곳 떠돌고' 화자는 그 이명의 울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시는 약속과 이행 사이에 놓인 심리적 갈등을 묘사한다. 시의 단단한 구조 안에서 소리는 돌고 돌며 공명을 일으킨다.

시를 읽으며 나는 사회구성원 간의 약속을 생각한다. 어쩌면 화자는 혼자의 힘으로는 그 약속을 지켜낼 수 없는 절망 속에 놓여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어떤 억압으로 약속의 언어는 죽고 의미 없는 기호만 남는다면 그건 두려운 일 아닌가. 따라서 시인의 이명은 약속의 무거움에 대하여 경고하는 울림이며 시인이 지켜야 하는 양심의 떨림이다. 시는 이명으로 받는 고통의 무게만큼 약속이 소중하다는 것을 일깨우며 독자들에게 연대감을 느끼게 한다.

불현듯 이태원 골목의 절규가 내 귀를 찌른다. 존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뼈아프게 사무치는 소리다. 슬픔의 소리는 온전한 형태를 지닌 채 오래도록 그 자리에 머문다. 약속의 책임을 느껴야 할 사람들이 아래 계단에 있는 사람만 지목한다면 그 사회는 청력을 잃은 사회이며, 자신의 귀속에서 울리는 이음조차 감지하지 못하는 막힌 사회다.

자책의 시간에 우리 시대의 이명을 듣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마음의 떨림이 당신에게는 있는가. 그저 웃는가 아니면 아파하는가. 새벽빛이 달팽이관을 스치는 시간, 시인의 질문이 통렬하게 심부에 와 박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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