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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며칠간 내린 비의 마술일까. 살구꽃이 활짝 피었다. 세상에 똑같은 모습으로 존재하는 사물은 없다. 어느 물질이든 시간의 경과에 따라 조금씩 변모한다. 자라나고 풍화되고 침식되고 경화하며 변화의 체계를 반복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계절의 변화가 있는 것처럼 사람에게도 계절이 있고 때가 있다. 화분에 숨어있던 작약에서 싹이 올라 나왔다. 올해도 꽃을 피울까 궁금하다.

꽃도 아니었다

열매도 아니었다

그것은 나무들의 심장

꽃들의 탯자리

메마른 어둠

거친 자갈밭에서도

가지 뻗고 꽃 피워

깊고 단단하게 제 몸 옭아매었다

바람 불고 눈서리치는

엄동의 계절

그들의 지하 벙커에서

밤새 불을 지펴

뿌리는 꽃의 얼굴

아니, 나무들의 집

차갑고 매운 겨울바람들이

뿌리에 향을 키웠다

「뿌리 꽃」 전문, 김동수 (시집 늑대와 함께 춤을, 천년의 시작, 2022)

겨우내 땅속의 한기를 견딘 나무뿌리의 생명력을 노래한 시다. 뿌리는 시린 겨울 동안 '지하 벙커에서 밤새 불을 지펴' 더운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가 봄이 오면 꽃을 피우게 하는 나무 생명의 근원이다. 그 뿌리에서 아름다운 '꽃의 얼굴'이 태어나고 가지를 뻗어 커다란 '나무의 집'을 만든다. 화자는 그 뿌리의 근원적인 힘을 키운 것은 '차갑고 매운 겨울바람'임을 말한다. 겨울바람의 냉혹한 기운은 생명을 메마르게 하지만 그 바람을 통해 만물이 성장한다는 역설을 이야기한다. 사람으로 보자면 이 뿌리를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 정신의 영역, 즉 바람으로 상징되는 고난을 이겨내는 강인한 의지이다. 살면서 겪는 많은 상처와 굴곡은 겨울바람과 같이 차갑고 매섭지만,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더 성숙해진 힘과 인격으로 자신의 꿈을 피운다. 나무뿌리의 향을 맡아본 적이 있는 사람이면 안다. 진한 원소로 빚은 강렬한 삶의 향기는 온갖 세월을 이겨낸 후에 만들어진다는 것을.

살구나무 아래에 선다. 작년의 꽃과 올해의 꽃은 같은가, 혹은 다른가. 같으면서도 다르지 않을까. 나무가 더 굵은 뿌리를 내려 깊은 땅속에서 뿌리 꽃을 피웠다면 더 많은 꽃 무더기가 올해는 피어날 것이다. 매년 조금씩 큰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어 몇 년 지난 후에는 하얗게 하늘을 덮으리라. 그리하여 시인은 '뿌리는 꽃의 얼굴'이라고 단정한다. 보이지 않는 땅속의 뿌리 모습을 상상하며 꽃의 진정한 얼굴이 뿌리라고 노래한 시인의 상상력이 경이하다.

4월이다. 이 봄에 무기력하다면 우리는 엘리엇이 말한 '가장 잔인한 달'을 맞게 되고 우리의 기억을 흔드는 상처 난 4월을 생각하게 될 거다. 하지만 우리의 뿌리가 견고하다면 더 많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우는 4월이 될 것이다. 너의 뿌리는 견고한가. 겨우내 얼마만큼 네 뿌리를 키웠는가. 혹시 허약한 뿌리로 더 많은 꽃과 열매를 기대하지는 않는가. 봄의 뿌리 꽃이 가슴을 여는 시간, 나는 나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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