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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거실의 카네이션이 말랐다. 마른 꽃잎은 흙빛으로 시들어간다. 꽃이 피기는 어렵지만 지는 건 쉽다. 하지만 두 주가 지났는데 아직 살아있는 꽃잎도 있다. 망설이다가 살아있는 꽃만 골라 작은 화분에 담아 베란다에 내놓고, 스마트 폰으로 뉴스를 뒤적인다. 두 소녀가 불발탄 위에 앉아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한 소녀는 불안한 눈빛이고 다른 소녀는 맑게 웃고 있다. 가슴이 찡하다. 아이들은 꽃송이처럼 예쁘지만 위태로워 보인다. 불현듯 저 팔레스타인 소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인다. 어른들의 전쟁은 순진무구한 동심을 무참히 파괴한다. 저 아이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마음이 시리다. 오월의 신록 사이로 한기가 몰려온다.

춥다

마음의 옷을 겹겹 껴입어도

몸은 벌판에 서 있다

무심코 기댔던 벽이

와르르 소리내어 무너지고

누군가

내 등을 자꾸 떠민다

어디로 가야 하나

밖은 정말 추운데

─ 사람과 사람사이·2 전문, 김선진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는 걸까. '마음의 옷을 겹겹 껴입어도 몸은 벌판에 서 있는'이 단절의 캄캄함. '무심코 기댔던 벽이 와르르 소리 내어 무너지고'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자신을 밖으로 떠미는 상황 속에서 시 속의 화자는 절망한다. 관계의 단절은 고통을 준다. 사랑의 바깥에 홀로 남는 것, 버려지는 것. 그 세계는 혼자만의 고독과 싸워야 하는 심연의 세계다. 그 어둠 속을 가야 하는 사람은 외롭다. 의지했던 존재가 실제로는 허상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는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다.

추운 벌판으로 나가야 하는 시인의 상황적 인식을 시대에 빗대자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사지로 내몰리는 사람들 마음이리라. 먹을 것이 없고 갈 곳도 없고 잠잘 곳이 없는 사람들, 세계 어느 곳에서인가 아우슈비츠 같은 처절한 공간으로 추방되는 사람들 말이다. 불발탄 위에 앉은 소녀에게 남은 희망이 있을까. 휴전이 이루어지고 평온한 일상은 지속이 될까. 과연 우리가 기대고 있는 벽의 실체는 무엇일까.

세상에서

제일 하기 힘든 것

빌리고 안 갚아도 되는 것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것

별을 따서

남몰래 삼키듯이

머뭇거리는 사이

또 삼키고 말았다.

─ 말-사랑한다는 말 전문, 김선진

그 벽은 참사랑이 아닌 '껍데기와 허울뿐인 위선'일 것이다. 위 두 편의 시는 개인적 사랑의 단절과 결핍에 관한 표현 같아 보이지만, 시를 되새기며 나는 '사랑의 부재'에 놓인 세계를 생각한다. 사랑의 방법은 사유가 아니라 행위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의 행위이며, 행동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인간의 행동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랑의 실천이다. 사랑은'빌리고 안 갚아도 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갚아도 갚아도 끝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사랑의 말을 하는 행위'에 빗대어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한다. 아주 작은 일인지 모르지만, 그것은 우주적인 사랑의 시초가 되는 것이다.

사랑과 감사의 달 오월. 세계는 '사랑의 부재' 속에서 흔들리고 있다. 베란다에 놓인 카네이션을 다시 본다. 어떤 대상을 사랑한다는 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걸 아끼는 일은 쉬우면서도 어렵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은 오직 암흑뿐이리라.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고립되고 버려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전쟁과 기아, 혹은 질병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모든 이들이 카네이션 빛 사랑이 가득한 행복의 집을 되찾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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