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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4.10.09 14:32:29
  • 최종수정2024.10.09 14:32:29

김정범

시인

새벽에 가을 안개와 만났다. 안개는 아직 가시지 않은 어둠과 섞이며 흰 세포를 공중에 퍼트린다. 빌딩의 형체가 사라지고 나무들이 조용히 모습을 감춘다. 안개는 거리에 낮게 깔리며 새벽길을 떠나는 사람들의 발목에 잠긴다. 발소리가 그들의 존재를 알릴 뿐, 사람들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한다. 더 깊은 안개에 갇히면 모두가 길을 잃으리라. 붉은 등을 깜빡이던 검은 차 한 대가 경적을 울린다. 나는 허공을 헤집어 안개의 살결을 만진다. 부드럽고 치명적인 유혹을 담고 있는 액체 가루를 훑으며 불현듯 헤르만 헤세를 떠올린다.

신기하여라, 안개 속을 걷는 것은!

모든 덤불과 돌이 외롭고

어떤 나무도 다른 나무를 보지 못한다

누구나 혼자다

내 삶이 빛나던 때에

세상은 친구들로 가득했으나

이제 안개가 내리면서

더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진실로, 피할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그를 떼어 놓는

어둠을 모르는 이는

현명하다 할 수 없으리

신기하여라, 안개 속을 걷는 것은!

삶은 외로운 것

아무도 다른 이를 모른다

누구나 혼자다

― 안개 속에서, 헤르만 헤세

아마 그는 숲길을 걷고 있었을 것이다. 가벼운 산책길이나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화자에게 엄습한 안개는 그를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지게 한다. 그리하여 서로에게서 멀어져가는 존재의 슬픔을 노래한다. 주변의 숲과 나무를 안개가 가린다. 시야가 가려진 공간에서 서로는 서로를 보지 못한다. 나무끼리 소통하지 못하여 모두 외롭다. 화자는 대상에서 받은 느낌을 자기 삶과 결부한다. "내 삶이 빛나던 때"는 아마도 젊은 시절의 이야기 아닐까. 삶의 빛은 누구에게나 있다. 많은 이들의 호평과 박수갈채를 받고 그들과 함께 행복하고 즐거운 삶을 지내던 시절 말이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밤과 낮이 있듯이 삶 역시 어둠이 있기 마련이다. 시 속의 '안개'는 사람끼리의 '관계'를 가리고 멀어지게 하는 존재로 어둠과 같다. '소통 부재'의 삶, 깊은 외로움이나 고독감에 젖어 있는 인생은 밝은 삶은 아니다. 하지만 화자는 그 '어둠'을 깨닫는 자야말로 "현명한 이"라고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이 조용히 모든 것에서" 사람을 "떼어 놓는" 안개의 본질은 '시간의 흐름'과 같다. 우리의 생명은 시간의 흐름 속에 놓여 있고 그 흐름을 아무도 피할 수 없다. 화자는 안개 속을 걸으며 "누구나 혼자다"라고 말한다. 그건 고립감이나 외로움을 넘어선 '인식의 전환'이다. 따라서 시는 외로움에 대한 직접적인 고백뿐만 아니라, 안개와 같이 스며드는 삶과 그 시간에 물씬 젖어 어느샌가 자기도 모르게 변화해 가는 인간적 생의 본질을 성찰한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일은 "안개 속을 걷는" 것처럼 신비로운 일이다. 우리가 모든 걸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몇 분 뒤의 일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지 않은가.

가로수 길의 은행나무를 만진다. 한 자리 뿌리를 박은 채 서 있는 이 나무도 홀로 외로울 것이다. 하지만 굳건히 선 나무처럼 내 자아의 뿌리를 더 깊게 가라앉힐 때 생의 외로움을 극복하는 현명한 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안개가 몸 안으로 스며든다. 차가운 한기가 느껴진다. 흰 증기 속에서, 희미해진 사물 속에서 눈을 크게 뜬다. 누군가 다가온다. 어쩌면 따듯한 빛을 쥐고 있을 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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