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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12.22 16:11:34
  • 최종수정2022.12.22 16:11:34

김정범

시인

목화솜 같은 눈이 내린다. 부드럽게 떨어지는 눈송이는 어느 나라의 부서진 전차 위로 내리고, 친구 잃은 자책에 생을 비운 아이의 사진을 덮고, 가스중독으로 쓰러진 노동자의 신음 위에 쌓인다. 한 해가 가는 시간, 눈은 어느새 흰색으로 리모델링을 끝낸다. 기이한 풍경이다. 바닥이 흰빛이니 사물이 밝아진다. 신비로운 빛의 세상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눈 내리는 날 시인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상념을 지우며 무겁고 두꺼운 시집을 연다.

눈이 소복소복 쌓였다 축복처럼

네모반듯한 학교 뜰에

크나큰 생일 케이크처럼 쌓여서 빛난다

하느님께서 뽑으신 선수처럼

아이들이 눈싸움을 벌인다

달아나고 쫓기고

되도록 힘껏 힘껏 밟아

자국이라도 깊이 남기고 싶은 듯이

은가루 같은 눈을 다 소유하지 못함이 아쉬운 듯이

눈송이를 뭉쳐 던지던 아이들도 어느새

눈에 묻혀 버렸는지

또 눈은 내려서 수북수북 쌓이고

운동장 저쪽 끝에서

성자처럼 점잖게 한 사람이 걸어오지만,

그도 마침내 눈에 묻히리라

─ 문덕수, 「눈雪」 전문

눈 오는 날의 정취를 그린 시다. 학교 마당에 쌓인 눈이 화자의 눈에는 '생일 케이크'로 보인다. 흰 크림을 바른 거대한 케이크, 누구의 탄생을 축복하는 걸까. '하느님께서 뽑으신 선수' 같은 아이들이 눈싸움한다. 아이들은 '자국이라도 깊이 남기고 싶은 듯이, 은가루 같은 눈을 다 소유하지 못함이 아쉬운 듯이' 뛰고 논다. 깊어지는 눈발에 아이들이 눈 속에 묻히고 '운동장 끝에서 성자(聖者) 같은 점잖은 사람이 걸어오지만', 그도 역시 눈에 묻힌다. 아마 화자 자신도 이미 눈 속에 묻혔으리라.

시의 이미지는 눈―축복―생일―케이크―하느님―아이들―눈싸움―성자로 이어진다. 시 속의 눈은 '탄생'의 발전기(dynamo)다. 뛰는 아이들은 눈 때문에 살아나는 생명력이고, 그 역동성은 깊게 쌓이는 눈발과 함께 대지를 감싸는 평화로운 힘으로 바뀐다. 시의 정경은 영화 속의 장면인 양 신비롭다. 눈이 케이크로 변하는 상상의 진동 속에서 아이들의 탄생과 놀이는 하얀빛의 변주를 울린다. 시는 종교적인 울림을 갖고 있다.

자연의 위대한 메커니즘 앞에서 인간은 작은 존재일 뿐이다. 뛰노는 아이들도 성자 같은 사람도 백색의 절정에 하나로 묻히는 건, 인간이 자연의 굵은 가지(bough)임을 뜻한다. 퍼붓는 눈의 웅장한 동력을 통해 시인은 '탄생과 창조'를 이야기한다. 하늘이 짓는 순백의 배경과 동심의 천진난만한 움직임 그리고 정중동(靜中動)의 세계로 들어가는 침묵의 성자. 동적인 하늘이 정적인 대지로 가라앉는다. 시인은 응시한다. 쌓인 눈에 평화가 있는 건 하늘이 내려온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리는 눈은 하느님이 주는 축복이다.

저무는 한 해가 마지막 불꽃을 피우고 있다. 어떤 이는 자책을, 어떤 이는 남은 꿈을 피우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슬프고 여전히 고통스러우며, 누군가는 기뻐하며 행복할 것이다. 성찰과 반성의 시간. 어지러운 감성을 묻듯 눈은 이 모든 이들의 어깨에 평등하게 쌓인다.

눈 내린 아파트 사이의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가로등에 비친 눈송이는 은가루처럼 빛난다. 작은 숲의 정경은 어느새 환해졌다. 순은으로 반짝이는 저녁이다. 저 은가루가 하늘의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내 존재와 생명에 대하여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삶의 어려운 순간을 잠시 잊으라고 저 빛이 내려온 게 아닐까. 흰 평화가 얼굴에 닿아 피부 깊숙이 스며든다. 숲에 쌓인 흰 하늘이 무한 갈래의 길을 알려준다. 삶의 또 다른 존재와 빛나는 방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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