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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22.10.23 15:25:21
  • 최종수정2022.10.23 15:25:21

김정범

시인

며칠 사이 나무들이 옷을 갈아입었다. 햇빛과 공기가 맑아서 책 읽기에 알맞은 계절이다. 얼마 전 받은 안재찬 시인의 시집 '바람난 계절'을 펼친다. 시에 빠져들며 잊었던 시간의 상처와 기억을 떠올린다. 딱딱하게 굳은 밥 같은 존재와 식은 국 같은 경험, 선연하게 우리 몸에 굳은 흉터 말이다. 몇 편의 시를 읽다가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춘다. 시집 안에서 번개가 치고 물방울이 손등을 때리며 천천히 흘러내린다.

나무와 풀이 일제히 방언을 하고 있다 비 내리는 숲속 잎새마다 후드득득 후드득득 무채색 속사포 언어, 인고로 쌓아 올린 성역, 소리 없이 무너져 날로 우울증 비만에 가슴앓이하다가, 번개가 떨구고 간 해독할 수 없는 방언에 하늘에 대고 울부짖는 것이다 방언과 하늘 사이에 거래가 성사되면 보이지 않는 상처, 아무리 빨아도 빠지지 않는 얼룩 지워질까? 파랗게

─「비 내리는 새벽 숲」 전문, 안재찬 시인 (시집 바람난 계절, 시문학사 2022)

표면상 비 오는 숲의 정경을 묘사한 듯하지만, 실상 깊은 의미를 지닌 시다. 화자는 비 내리는 숲에서 소리를 듣는다. 물은 하강하고 소리는 상승한다. 잎새와 빗물이 부딪치는 소리는 '방언'으로 들린다. 시의 방언은 사투리가 아니라, 나뭇잎 하나하나가 가진 고유언어를 뜻한다. 바로 하늘에 대고 외치는 '기도'다. 잎새는 오랫동안 참으며 '가슴앓이'하다가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무언가를 갈구한다.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걸까. 화자는 '방언과 하늘 사이에 거래가 성사'되길 기대하며 기도의 응답을 구하지만 '번개가 떨구고 간 해독할 수 없는 방언'이 의미하듯 하늘은 인간적인 거래는 하지 않는다. 따라서 '빠지지 않는 얼룩'이나 '보이지 않는 상처' 즉, 인간이 저지른 여러 죄와 가슴 속의 트라우마는 모두 깨끗이 지울 수 없다. 이러한 근원적 절망 속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연적 평화에 대한 뼈아픈 갈망이 숨어있다.

시인의 정신은 대상을 초월하는 운동성을 갖는다. 시인의 눈에 잎새는 헐벗은 채 비를 맞는 사람이고 기억의 회오리 안에 웅크린 어떤 존재, 상처의 흔적을 지닌 어두운 영혼이다. 시인은 하늘을 향해 갈구하는 그들의 음성을 자신의 침묵 안에서 찾아낸다. 사유의 에너지를 응축한 이는 타인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그것을 전할 수 있다.

시집의 다른 시에서 시인은 구체적인 '얼룩과 상처'를 드러낸다. 그것은 '빙하를 물어뜯어 멀미 나는 세상'에 '흰뼈 남겨두고 황천길 가는' 자연의 고통(구상나무, 어이어이)이기도 하고, '분노 공평한 자유의 나라'(비약법)에 대한 거부이기도 하며, '유서 한 장'으로 '이 땅을 먹구름에 잠기게 하고 홀연히 떠난' '열네 살 소녀들'의 죽음(먹구름 한마당)이기도 하다. 시 속의 인간 세상은 황폐하고 아프다. 많은 시가 지구 환경 문제, 물질화 자본화로 인한 불균형, 인간성과 자연성을 잃은 세계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한다.

그러나 '개인지 늑대인지 모를 시간'(쓸쓸히 봄마당) 속에서도 시인은 '만인에게 공평한'(바람난 계절) 시대가 오기를 꿈꾸고, 아직 원시성을 간직한 '별의 고향 아프리카'가 '순백의 땅'(별에게 묻다)으로 남아있기를 소망한다. 깨끗하고 순수한 세계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나는 울분과 사랑 그리고 슬픔과 기도가 이 시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름다운 방언이다. 빛나는 가을, 무채색 기도에 대한 응답이 시인의 염원대로 이루어지길 빌어본다. 가을 하늘도 깊어지고 있지 않은가. 파랗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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