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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한바탕 소나기가 쏟아진다. 하늘의 지붕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은 아름답고 정겹다. 물방울은 잎사귀와 줄기를 타고 굴러 내려와 흙을 적신다. 물의 살아있는 힘은 식물의 뿌리를 흔들고 새잎과 줄기를 돋게 한다. 물 없이 살 수 있는 생명이 있을까. 물은 자연과 문명의 근원이다. 생명의 지속과 직결되는 까닭에 물은 태곳적부터 주술과 관련이 있다. 옛사람들은 가뭄이 들었을 때 비를 부르기 위해 하늘에 기우제를 지냈다. 가뭄이 들면 신이 노했다고 생각했으며 그 노여움을 풀기 위해 제를 올려 신에게 감사하고 신이 은혜를 베풀어 비를 내려주기를 빌었다. 그러한 주술적 행위는 신과 자연과 인간을 하나로 잇는 의식이었다.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우리가 물이 되어' 전문, 강은교

주술적인 느낌을 주는 위 시는 불의 파괴성을 물로 승화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화자는 멀고 먼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에게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이 되어 만나자'라고 청한다. 이 시에서의 물은 한 방울씩 모여 거대한 바다에 닿는 생명의 흐름이고, 불은 그것을 없애버리는 죽음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화자는 지금 불타고 있는 현실 속에 있음에 틀림이 없다. 재가 되는 현실을 느끼며 화자는 열망하는 존재에게 물이 되어 만날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고 아직 깨끗한 원시의 바다, 더 넓고 깊은 바다에 닿기를 갈구한다. 더 큰 사랑에 대한 소망과 기원일 것이다. 일상에서 우리의 만남과 사랑은 어떠한가. 우리의 삶의 질서는 어떠한가. 때론 불처럼 타오르기만 하여 관계를 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때론 너무도 격한 사랑에 그대로 숯이 되어 스러지고 있지는 않은가.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격함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하나가 된다면 얼마나 좋은가. 시의 내적인 의미는 높은 데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며 바위를 만나면 스스로 비껴가는 부드럽고 강한 마음과 고양된 정신의 추구이다. 나중에 인터뷰한 기사를 읽고 안 사실이지만 시인은 이 시를 남북관계를 염두에 두고 썼다고 한다. 시인의 염원처럼 우리가 하나의 강물로 큰 바다를 향해 흐를 날이 있을까. '가장 넓고 깨끗한 하늘을' 남북이 함께 볼 수 있을까.

소나기가 그치고 뭉게구름이 모여든다. 구름은 물의 씨앗이다. 동편 하늘의 모습이 적도지방의 그것처럼 아름답다. 파란 하늘과 흰 구름의 선명한 대조는 그림 속의 풍경 같다. 안타깝게도 시인이 추구하는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는 아직도 우리의 가슴 속에서만 출렁이고 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날이 오리라. 안개 낀 한라에서 얼음 덮인 백두까지 기적의 비가 쏟아져 내리고 우리가 다시 한 줄기로 흐르게 될 것을 변함없이 믿는다. 수천 년을 함께 했던 '초월적인 사랑'은 우리의 몸 어딘가에서 여전히 꿈틀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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