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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때는 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무수한 꽃이 산과 들과 강변에 형형색색 피어있다. 꽃이 피면 아름다움에 도취해 경탄하지만, 꽃의 생명은 그리 길지 않다. 얼마 전 무심천에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은 가늘게 내리던 비와 바람에 모두 떨어졌다. 진 꽃잎은 바람에 날려 여기저기 쌓인다. 땅바닥에 떠다니는 꽃잎이 아쉽기만 하다. 모란을 잃고 '찬란한 슬픔의 봄'을 노래한 영랑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시인들의 민감한 감성은 '아름다움의 상실'에 대하여 늘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떨어진 꽃잎을

피해 가는 걸음이 없다

며칠 전 산 하나를 물들여 놓아

화려한 입담으로

말 잔치 벌이던 꽃잎들이

가지 박차는 박새 날갯짓에

훨훨 날아다니고

아이들 웃음소리에도

비단옷 벗어 던지듯 팽개쳐서

소로 길에 쌓였는데

운동화 끈 질끈 동여맨 사람들이

꾹꾹 눌러 밟아 다진다

이름 지어주고

꽃말 붙여 전설을 만든 그 이야기가

참말이었던가

꽃은 피었다가 떨어지는 게 아닌

떨어져야 사는 영생의 밧줄

꽃잎 밟는 걸음들이 힘차다

─ 꽃잎 밟기 전문, 이오장

시인은 산행하면서 수북이 쌓인 꽃잎과 그것을 밟고 가는 행인의 발길을 본다. 꽃이 피었을 때는 누구나 아름다움에 취하여 환호하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감탄하지만, 시들어 떨어진 꽃에는 아무 관심이 없다. 이미 낡고 시들어버린 대상에 사람들은 집착하지 않는다. 생기를 잃은 대상은 의미도 함께 잃는다. 시인은 밟히는 꽃잎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황홀한 빛과 향의 여운과 추억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꽃잎을 밟는 사람들이 밉기까지 하다. 시인은 '꽃말 붙여 전설을 만든 그 이야기가 참말이었던가' 하며 인간의 변덕스러움에 회의한다. 피어있을 때 생각했던 '사랑의 약속, 기다림, 순결, 고귀, 열정' 같은 꽃말은 꽃잎이 흙바닥에 눕는 순간 의미를 잃는다. 무가치한 존재가 되어버린 시든 꽃잎. 하지만 낙화한 꽃의 실체는 죽음이 아니라 씨앗을 남기고자 하는 생명의 힘 즉 '영생의 밧줄'이라고 시인은 표현한다. 벌과 나비를 불러 생명 활동을 하던 꽃의 소멸은 씨앗이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자연의 섭리는 여러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며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는다.

인간의 삶은 어떠할까. 한때 주목을 받고 이름을 떨쳤던 사람도 어느 때가 지나가면 그 명성이 시들고 말라서 잊힌 존재가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옛 이름은 소멸하고 새로운 영웅, 새로운 천재가 나타나 명성을 떨친다. 옛 꽃은 지고 새 꽃이 피어나는 개화와 낙화의 순간은 인간사에도 늘 일어나는 일이다. 불현듯, 저우화진(周華健)의 노래 화심(花心) 한 구절이 떠오른다.

춘거춘회래 화사화회재개 (春去春會來 花謝花會再開)

'봄은 가지만 다시 오고 꽃은 지지만 또다시 피어난다'는 뜻이다. 삶의 영원성은 수없이 많은 삶이 되풀이함으로 이룰 수 있는 것 아닐까. 꽃잎을 밟으며 시인은 다시 피어날 사랑과 꿈 그리고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 아니었을까. 희고 붉고 노란 꽃잎의 탄생과 소멸을 바라보는 봄. 살다가 우리의 삶이 다소 망가지거나 부서진다 해도, 새로운 꽃잎의 탄생을 위해 기꺼이 떨어지는 낙하를 감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삶이야말로 꽃의 삶과 같지 않은가.

화단에서 영산홍이 봉오리를 연다. 또 다른 꽃의 세계가 열린다. 붉디붉은 가락, 자줏빛 노랫소리가 함께 들린다. 그 밝은 음률은 영원의 빛이 울리는 행진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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