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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빛나는 가을날, 연보랏빛 시집을 저자에게 직접 받았다. 김나비 시인의 첫 시집 '오목한 기억'이다. 기대감과 함께 시집을 읽었다. 시집에는 시간을 넘나들며 몽상과 현실을 조합한 60편의 시가 실려 있다. 시 속에서 시인은 상처를 지닌 다양한 대상에 자신을 투사한다. 그 대상은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사이보그, 계단, 그림자, 항아리 같은 사물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자아의 변이 혹은 탈피과정을 통해 시인이 추구하는 건 대상과의 동일화 작업이다. 시인은 타자의 고통을 어떤 형태로 용해하고 응집할까. 여러 편의 좋은 시 가운데 한 편을 골라 소개한다.

어제를 십자가에 매달아요

하늘엔 나이가 없고 미모엔 국경이 없지요

하이힐에 잘린 아픔을 끌고 병원으로 향해요

갈비뼈를 두 개 빼주세요

피부를 문지르면 하얀 장미가 될까요

얼굴엔 파란 눈빛을 심을까요

시간을 오려 자유를 당겨 주세요

입보다 큰 눈은 내 생의 필요충분조건

울음을 숨긴 빨간 미소는 창가에 걸어놓을래요

가느다란 금발이 어깨너머 햇살처럼 출렁여요

잘린 목소리는 어디에 숨겨야 하나요

가슴 파진 드레스는 하체를 마음껏 부풀리죠

나는 백인 금발 사람이고 싶죠

오늘은 피 본 금요일

나의 피를 사주세요

오래전 셀마*에서 내일 만나요

*미국 앨라배마주 중부, 인권운동의 중심지

─ 「미스 셀마」전문, 김나비



시는 백인이 되고 싶어 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다. '미모'를 찾기 위해 여인은 '병원을 향한'다. 그녀는 '하얀 피부, 파란 눈빛' 그리고 '금발'을 갖고 싶다. 가는 허리를 위해서라면 '갈비뼈'라도 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외모를 바꾼다 해도 '잘린 목소리'는 숨길 수 없다. 그 누구도 자신의 혈통, 즉 유전적인 뿌리를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시는 '미의 추구와 욕망'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사실 시인의 의도는 다른 데에 있다.

1965년 3월, 미국 흑인들은 투표권을 얻기 위해서 셀마에서 비폭력 저항 운동을 벌였다. 그들은 저항의 표시로 셀마에서 몽고메리까지 행진을 강행했다. 희생자가 있었지만, 세 번의 시도 끝에 행진은 3월 21일에 성공한다. 결국, 같은 해 존슨 대통령은 '투표권법 (Voting Rights Act 1965)에 서명하였고 셀마의 저항은 민주 인권의 승리를 이루어냈다.

시에서 묘사된 백인은 인종 사이에 놓인 거대한 벽을 의미한다. 그 벽이 무너지지 않는 한, '어제의 십자가'는 오늘도 내일도 누군가 매달려야 하는 십자가다. 시에서 화자는 '피 본 금요일'에 흘린 자신의 피를 사달라고 청유한다. 피로 상징되는 '저항과 자유와 인권'을 잊지 말라는 주문이다. 따라서 '오래전 셀마에서 내일 만나'자는 약속은 평등한 미래를 지키고 싶은 굳은 마음의 표현이며 또한, 인종차별이 일어나는 세계에 대한 무거운 경고이기도 하다. 지금도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차별과 분리, 인권 탄압'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차별과 분리'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나라에도 200만 명이 넘는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다. 자주 그들에 대한 차별 문제가 뉴스에 보도되기도 한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는 가깝고도 먼 진리를 지키기 위해 먼저 우리 주변부터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시에서 여인의 목소리는 저항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가녀린 몸부림'이지 않은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 밤. 시집의 다른 페이지를 펼친다. 추운 계단에 웅크린 노숙자의 모습이 보인다. 불현듯 시인의 '오목한 기억'은 버려진 존재를 비추는 시의 불빛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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