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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범

시인

비가 내린다. 살구가 툭툭 떨어진다. 노랗게 익어 살이 통통하다. 모과나무의 열매는 아직 푸릇푸릇하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경보가 스마트폰 속에서 반짝인다. 두 달간 비가 오락가락했으나 많은 비는 오지 않았다. 태양을 빙빙 도는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계절이 생기고 비와 눈이 내리며 우리의 감정이 미묘하게 변한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비는 대지에 깊숙이 내리꽂히며 다산성의 흙을 일깨운다.

빗줄기 저리 많음은

비가 빗속으로 숨기 위함이지

비가 빗속으로 숨자

또 하나의 비를 세워 또 하나의 비를 숨긴다

비의 집을 짓는다

비 앞에 비가, 비 옆에 비가, 비 뒤에 비가

또 그 비 뒤에 비가 산다

비 뒤에 그리운 이

살아서 온다

아니 살리려고 온다

저 땅에 어린母들

유영삼, 「비의 집」전문 (시집 비는 소리를 갖지 않는다, 도서풀판 지혜 2022)

비를 소재로 한 시인데 묘한 느낌을 준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시적 장치 때문이다. 이 시의 "비"는 중의적인 의미를 품는다. 시인은 '비'란 하나의 어휘에 여러 의미를 섞는다.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비'라는 말은 리듬감을 주기도 하고 '빗물'이 가진 고유한 성질에 새로운 감성을 부여한다. 시 속의 비雨는 슬플 悲, 돌기둥 碑와 같은 동음이의어 즉 다른 어휘와 중첩적으로 사용되어 새로운 이미지를 낳는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은 화자의 눈물과 같아 슬픔(悲)의 정서를 지닌다. 비라는 어휘는 '그리운 이'의 죽음과 그 사람의 묘비를 떠올리게 한다. "비 뒤에 그리운 이"는 묘비의 뒤에 누운 '어머니'이다. 비가 내리는 까닭은 모내기 한 "땅의 어린 모"를 살리기 위해서이고 동시에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젊은 어머니(母)들의 삶을 살리기 위해서다. '비의 집'은 빗물이 떨어져 내리는 '어머니의 묘'로 읽을 수 있지만 우리가 사는 온 대지일 수 있다. 대지·흙은 모체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풍요로운 땅은 따듯한 어머니의 품처럼 다산의 상징이며 행복한 삶의 터전이다.

시 속의 비에는 독특한 리듬이 있다. 비는 떨어지며 사물과 부딪쳐 소리를 내는데 그 사물의 모양과 질에 따라 다른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비가(悲歌)일까. 어머니가 비가를 부르고 어머니가 된 젊은 딸이 그 비가를 따라 부르는 걸까. 빗소리는 어머니의 소리와 딸의 소리가 합쳐진 소리다. 그 소리를 따라 어머니는 살아서 다시 돌아온다. 빗줄기와 소리, 시 속에서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비'라는 어휘는 놀라운 주술적인 효과를 가진다. 그리하여 농사를 짓던 한 어머니의 삶이 이 땅에 사는 딸들의 삶으로 이어지는 '세계 확장의 효과'를 발휘한다. 따라서 대지를 "살리려고 오는"비는 강렬한 어머니의 사랑을 나타내며 죽은 어머니를 환생하게 하는 극적인 장치이다.

내리는 빗줄기 속에서 어머니의 사랑과 만물을 살리는 대지와 삶의 모습을 그린 시인의 상상력과 압축적인 감성에 경탄의 마음을 보낸다. 슬픔은 소멸하는 게 아니라 적극적인 삶의 원천이 된다는 것 그리고 우리의 눈물이 대지를 키우는 소망이 된다는 걸 깨닫게 하는 시이다. 빗물은 땅 위에 사는 생명체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아닐까. 시를 읽으며 우리 생명을 키우는 건 인간 자신이 아니라 우주적인 원리에 있음을 다시금 생각한다.

빗소리가 오케스트라의 합주처럼 들려온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소리, 나뭇잎에서 깨지는 소리 그리고 모여진 물방울이 흐르는 소리다. 빗물은 모여 논과 밭으로 과수원으로 강으로 바다로 흐르리라. 우리 생의 원천인 생명들이 푸르게 깨어나리라. 생명의 경이로운 기적을 위해 비의 집에 비가 끝없이 쏟아져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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