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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애

수필가·공인중개사

관광버스가 마지막 휴게소에 들어섰다. 곧 이어 여행객들이 하나 둘 내리더니, 휴게소 마당 음향기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다. 차내 가무단속이 없던 오래전 일이다. 봄·가을이면 년 중 행사처럼 나들이를 했다. 운전기사는 모처럼 일상에서 벗어난 이들의 기분을 돋아 주려고, 신명나는 음악을 틀어 주었는데 산천을 즐기고 온 그들이 아직도 여흥에 취해 있었다. '취하다' 의 사전적 의미는 '무엇엔가 골몰하고 있는 상태, 또는 마음이 쏠리어 넋을 빼앗기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날 가끔 들르는 지인의 보리밥 집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의외로 손님이 많았다. '시내 맛 집으로 갈까' 하고 돌아 나오다 이웃한 한정식 뷔페로 들어갔다. 모서리에 위치한 그 집은 바쁜 시간이 아닌 듯 서너 좌석에만 손님이 있었다. 식성에 맞는 반찬을 접시에 담아 와서 자리에 앉으려 할 때, 문득 왼쪽 벽에 그려진 그림이 눈에 띄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채운 여인의 초상화였는데 어디서 본 듯한 얼굴이라 생각 하고, 있던 중에 옆을 스쳐 지나가는 여인이 보였다. 조금 전에 출입구 계산대에 앉아있던 여인이었다. 홀을 오고 가며 기물을 나르는 품새가 아마도 음식점의 사장인 것 같았다. 바로 그림의 실제 인물이었다. 벽화 속의 여인은 시원한 이마에 큰 눈, 웬만한 일에는 눈썹하나 까닥하지 않을 범상치 않은 곧은 인상이었다. 그림 옆에는 웅혼한 필체의 글과 ··음악협회 회장이라는 직함이, 아래에는 그림을 그린 이와 글씨를 쓴 이의 이름이 낙관처럼 적혀 있었고, 필체가 모두 다른 것을 보아 아마도 3명의 합작품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그림의 '주인공은 무슨 훌륭한 일을 했을까' 궁금증이 일었다. 가까이 가서 짧은 한문 실력을 동원하여 풀어 본뜻은 효심을 칭송한 글이었다. 그림을 그린 이들은 그림속의 여인을 잘 알고 있는 듯 했다.

밥을 먹으며 속으로 '시어른을 잘 모셨는가 보다'라고 짐작했다. 왜냐하면 여자는 친가 쪽보다 시댁 어른을 잘 공경 했을 때 세인으로부터 우러름을 받는지라, 식사비를 지불하면서 직접 물어 보았다. "시부모님을 모셨는가 보아요?" 했다. 그녀는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다시 "예술을 하셨는가요? " 물었더니 그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내가 묻는 의중을 꿰뚫었다는 표정으로 말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걸작이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술에 취(醉)한 자들이 그렇게 해 놓았다"는 것이다. 기대와는 너무 다른 말 이었다. 그 말을 듣자 이내 그림을 그렸다는 취한 자들이 알고 싶어졌다. 어떤 사람들일까.

단순하게 밥을 먹으러 온 식객이 여사장의 후한 인심에 그림을 그렸을까. 아니면 거나해진 취객이 술기운으로 탁자 위에 올라가 그린 그림일까. 입술 위에 연분홍으로 채색되어 있는 정교한 그림은 분명 한날, 불현듯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아마도 막역한 사이의 지기들일 것이다.

미디어의 발달로 시공간을 초월한 친구가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벽화의 그림과 글속에는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그들만의 진득한 유대감이 느껴졌다. 그녀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아는 자만이 그릴 수 있고 지을 수 있는 충정(忠情)이 담뿍 배어 있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온 지기들은 김치전 하나 놓고 막걸리 잔을 기울이다 외출한 여사장 이야기를 했을 것이고, 취중임에도 한마음 한뜻으로 이렇게 대작을 남겼으리라. 어디를 가도 사람이 풍경이다. 산경(山景)에 취하고 흥에 취한다고 한들 사람에게 취하는 것 이상의 강렬함이 또 있으랴.

'효심이 지극한 자 대대로 만복을 기원합니다.' 취한 자들의 초상화는 나 스스로를 돌아보게도 하였다. '취한 자', 나에게는 몇 명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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