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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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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채만 한 파도가 하얀 거품을 안고 밀려왔다 다시 파란 바다 속으로 멀어져 가버린다. 백사장에는 덩그마니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고 그 옆에 금발의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여인이 서 있다. 어린소녀가 출렁이는 파도 바람에 나비춤을 추고 있는 영화. 오래전에 본, 제인 캠피온 감독 홀리헌터 주연의 섬세한 연기력이 인상 깊었던 ' 피아노'의 첫 장면이다.

19세기 말 20대 미혼모 '에이다'가 아홉 살 사생아인 딸 '플로라'를 데리고 얼굴도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 낯선 땅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여섯 살 때부터 말하기를 그만두고 침묵을 선택한 에이다. 그녀에게 세상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는 피아노와 플로라뿐이다. 모녀를 데려가기 위해 해변 가에 온 남자 '스튜어트'는 에이다에게 생명만큼이나 소중한 피아노를 버리라고 한다. 피아노를 두고 갈 수 없었던 에이다는 바닷가에서 피아노를 연주한다. 이 모습에 반한 또 다른 남자 '베인스'와 에이다는 비밀스럽고도 열정적인 사랑에 빠져든다는 줄거리다.

영화가 촉진제였을까. 어렸을 적 배우고 싶었던 피아노 교습을 받기로 했다. 낯선 악보를 보며 서투른 손가락으로 작은 씨앗 같은 음표를 보고 건반 88개를 하나하나 짚어 봤다.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는 것이 좋았고 맑고 애잔한 선율은 나를 흠씬 빠져 들게 했다. 밤하늘을 수(綬)놓은 별빛 아래 객석을 휘감는 피아노 연주회의 현란한 손놀림은 건반 위에서 백조가 날갯짓을 하는 듯 했다. 그런데 피아노에 취해 있던 감상과는 다르게 진도가 나가지 못했고, 생활의 변경으로 계속되지 못했다.

사계절이 몇 번 지나가고 도돌이표처럼 다시 피아노 앞에 돌아와 앉았다. 시간이 조금 자유로워진 날, 미뤄뒀던 숙제를 하려는 아이처럼 피아노 덮개를 열고 한 음씩 눌러 보았다. 손가락 끝에 닿는 음 하나하나가 생생하게 살아나 몸의 세포를 깨워주는 듯 했다. 이제는 방향을 바꿔 클래식보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 30여 곡을 선정해 실용 반주를 목표로 배우기 시작했다. 사랑의 기쁨, 엘리제를 위하여, 넬라 판타지아 등을 펼친 화음으로 멋을 내보기도 했다. 익히 알고 있는 멜로디라 연습에 무리는 없었다. 반음 올리고, 반음 내리고. C는 도 미 솔, Csus4는 도 파 솔. 즐거운 연습은 이제 스물다섯 곡을 돌파했다. 노년의 손가락 움직임은 건강에도 좋다고 했다. 기억하지 못한 이음(異音)을 손가락이 먼저 찾아줬고, 새 곡을 연습 할 때는 새로운 감성이 뿜뿜 돋아났다. 사람마다 작은 몸짓 하나에도 저마다의 다른 음색이 있다고 하는데, 만약 지금의 내 인생에서 반음을 올렸다면 나는 어떻게 변했을까. 살아오면서 건반을 열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있는 듯한 중압감이 느껴졌을 때, 누군가 '새끼손가락 한음이라도 대신 해 줬으면' 했던 간절함이 있던 시간도 있었다.

세월 따라 음감도 변했다. 젊은 시절에는 강렬하고 빠른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이제는 자연의 소리에 가까운 부드럽고 잔잔한 리듬의 음악을 듣게 된다. 절제한 음을 혼자 연주하는 개성 있는 독주회도 좋지만, 여러 사람이 각기 다른 악기로 음정과 박자로 조화를 이뤄내는 오케스트라 연주는 영혼을 정화하고 가슴속 깊이 울림을 준다. 며칠 전, 학원시간을 맞춰 가던 중 신호등에 걸렸다. 그때 라디오 방송의 프로그램이 '고민상담'이었던가 보다. 34세의 처녀가 용기를 내어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학원에서 만난 꼬마 아이들이 교본을 보면서 "바이엘이네"하며 시큰둥하더란다. 그것이 부끄럽다며 상담을 해왔다. 순간, 운전대만 잡고 있지 않았다면 내가 답을 해 주고 싶었다. "여기 이순이 훨씬 넘은 아줌마도 있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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