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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수필가

새벽 3시에 잠을 깨면 다시 자기도 깨어있기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개츠비처럼 새벽 세시의 왈츠를 듣기도, 부두 끝자락에 있는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찾아 헤매기도 난감한 시간인 것이다.

새벽 세시를 전후해서 잠을 깬지가 벌써 한 달 가까이 되었다. 출근까지 전적으로 나의 통제권 아래 놓여 있는 꽉 찬 서너 시간의 고독, 창문을 열어 바람을 쐬고 어두운 밤하늘을 쳐다보면 차가운 겨울잿빛 안개가 온 세상을 채웠다.

오늘의 새벽 3시는 짙은 안개 속에서 어제 읽다만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를 마저 읽고, 김수영의 '풀'을 읽는 것으로 열었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바람보다 더 빨리 눕고,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저 파릇파릇한 풀들의 자유와 저항정신을 사색하다가 내 10대 때의 풀잎을 떠올렸다.

1977년도에 출판된 손바닥만 한 삼중당문고,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은 고교시절 내내 내 손안에 들려있었다. 수십 번의 이사와 30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도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누렇게 색이 바래고 너덜너덜해진 상처 난 모습으로 아직껏 나와 함께 살고 있었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읽었을 그 활자 냄새가 지금도 진하게 다가왔다.

"풀은 무엇입니까?" 한 아이가 손에 가득 풀을 뜯어 묻는다. 풀은 희망의 풀 천으로 짠 나의 천성의 깃발, 신의 손수건이거나, 신이 일부러 떨어뜨린 향기 나는 선물, 그랬었다. 풀잎 하나가 별의 운행에 못지않다는 그 정연한 확신만으로 시 한 구절 한 구절을 읊조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고, 난 이 고적한 새벽에 홀로이 나와 마주섰다.

그동안 난 무엇을 쫓아 살아왔던가? '위대한 개츠비'처럼 데이지의 초록색 불빛을 꿈꾸는 환상을 가졌던가? 궁극의 희열을 간직한 미래를 믿었던가? 결국은 어리석게 파멸하는 허상일지라도 온 힘을 다해 피 흘리는 위대한 몸부림을 쳐 왔던가? 아니면 바람보다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웃었던가? 그래서 먼저 일어섰던가? 신이 떨어뜨린 향기 나는 선물을 기꺼이 즐거워하며 받아들였던가? 바다와 숲의 향기를 흠뻑 머금은 원초적 인간으로 살겠다는 풀잎의 천성을 활짝 펼치고, 신의 손수건을 깃발처럼 휘날리며 살아왔던가?

혹여 하릴없는 잡담과 천박한 호기심으로 세상을 더럽히지나 않았는지, 겉치레뿐인 허세와 끝 모를 부르주아의 탐욕과 어리석음의 생존모드로 애매한 몸짓만 되풀이하지 않았는지, 먹고 살아간다는 알량한 핑계로 생을 소홀히 대하지는 않았는지, 그리하여 화석이 된 풀잎처럼, 하이데거가 말한 '뿌리 뽑힌 존재양식'으로 굳어버리지는 않았는지 어둠속에서 나에게 묻고 또 물었다.

깨어있던 새벽 3시의 시간은 이 무한 광대한 우주공간에 나만의 소박하고 비밀스런 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오랫동안 잘 길들여진 수레바퀴로 굴러가던 나른한 시간이 촘촘한 흥분으로 다시 부풀어 올랐다. 세상을 재배치하는 돈오돈수의 순간이 참으로 긴 세월의 뒤안길을 지나 이 새벽에 들이닥친 듯 했다.

어두운 길이 소실점을 향해 달려가듯 안개로 뒤덮인 밤의 장막이 거둬졌다. 오롯이 싱싱하고 파릇파릇한 풀잎을 되새김질하던 새벽시간이 지나가고, 그 사이 세상의 배경은 새로운 혈류처럼 파란 하늘빛으로 바뀌어졌다.

창을 여니 얼음냄새 나는 겨울바람이 몰아쳤다. 하지만 머지않아 해빙의 봄비가 이 차가운 대지를 꿈결처럼 적셔 깨울 것이다. 사라져버린 풀잎들이 검고 단단한 씨앗들을 깨뜨려 선명한 푸름으로 다시 소생할 것이고, 어두운 땅 밑에서 찬란한 초록빛 깃발로 우뚝 솟아나 자유로이 휘날릴 것이다.

눈부신 아침 햇살 속에서 내게 물었다. "풀은 무엇입니까?" 아이처럼 다시 물었다. "나는 무엇입니까?" "삶은 무엇입니까?" 묻고 나서야 풀도, 나도, 삶도 결국 똑같은 말들이고 똑같은 질문임을, 난 문득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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