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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웹출고시간2013.02.27 15:18:30
  • 최종수정2013.08.04 00:44:01

장정환

수필가

낮이 밤으로 바뀌는 지점에 무작정 닿은 선창, 저 멀리 수평선에 푸른빛과 주황색의 신비가 포개어졌다. 그 황홀한 순간은 아주 짧아서 잠시 머뭇거리다 보면 그 빛의 스펙트럼은 이내 사라지곤 했다.

이 지상의 삶에서 힘겹게 표류하고 있다고 느낄 때, 아니면 막막한 외로움의 심연으로 한없이 가라앉고 있다고 느낄 때 난 바다로 달려가야만 했다. 항상 그래왔다. 거친 바람소리 술렁이고, 갈매기 끼룩대는 바닷가의 비릿한 파도 냄새를 맡지 못하면 못살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바다는 날 불러들였다.

푸른빛과 주황색의 경계지점으로 어둠을 뚫고 작은 배 한척이라도 다가오면 행복했다. 이제 좀 살 것 같았고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섬 그늘에 굴 따러 간 엄마를 기다리다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스르르 잠이 드는 '섬집 아기' 마냥 난 그때에서야 평화로웠다.

바다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에게 드러났다. 어둠 속에서 파도의 검은 빛을 응시하다보면 파도의 물빛이 따스한 목소리를 들려주곤 했다. 귓전을 울리는 조곤조곤한 음성들이 나의 혼란을 가라앉혀 주었고, 사나운 기세로 포효함으로써 내 속에 잔뜩 웅크리고 있을 그림자들을 하찮게 만들기도 했다.

바다의 리듬에 내 몸을 맡길 때면 밀물과 썰물의 순리처럼 내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이면서도 지극히 무의미한 존재라는 이중의 목소리를 듣기도 했다. 밀물과 썰물, 시간이 들고 나는 자리, 있다가 없어지고 없다가 있어지는 그 장소에서 난 이 지상의 뒤척이는 순간들을 떠올렸다.

이제는 용도 폐기되어 개펄위에 주저앉은 목선들, 그 너머로 생존의 바다로 나간 배들이 만선인 채 의기양양하게 포구로 깃들 때, 난 소금기 절은 갯바람을 가슴깊이 들이 마시곤 했다.

대서양을 네 번이나 횡단했던 스티븐 캘러핸의 '표류' 이야기를 읽고부터 바다는 내게 또 다른 삶의 은유가 되었다. 항해란 영혼의 성지 순례와 같고, 바다는 성스러운 기도처라던 그는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일 때조차 자신의 영혼을 세상과 얼마나 많이 나눌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의 표류이야기는 내가 광대한 바다에 설 때마다 떠오르는 생존의 메타포가 되어, 작은 포구 앞에서 깜빡이는 등대 불빛처럼 밝게 빛났다.

지난 추운 날 찾은 남해의 섬은 오히려 제 몸의 깊고 무거워진 외로움을, 섬을 휘감는 검푸른 파도로 달래고 있었다. 나보다 더 짙은 외로움으로 뒤척이는 그 섬을 천천히 거닐며 이제는 내게 더 이상 달려갈 바다가 없을 거란 예감이 불쑥 솟아났다. 아니 달려갈 필요가 없음을 알아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내 몸을 스치는 바람이 내가 발 딛고 있는 곳에서 묻혀온 바로 그 바람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몸 붙여 사는 삶이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난 나를 따라 다니던 그 싱싱한 바람조차 느끼지 못했고, 나의 발아래 드리워진 어둠속에 얼마나 다채로운 빛깔을 숨기고 있는지 미처 몰랐다.

바다를 향해 달려간 내 발걸음은 지금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땅, 결국은 내가 있어야 할 바로 이곳을 확인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다. 내가 표류하면서도 축제처럼 기뻐하고, 뼈저리게 외로워하면서도 맘껏 웃을 수 있는 곳이 이 곳임을 입증하기 위한 또 하나의 모색이었던 셈이다.

내가 살던 대지에서도 빛을 극복한 저녁이 석양노을로 붉게 타 올랐고, 태양이 떠오르는 아침이면 밤을 이긴 빛이 하늘에서 파란 물빛으로 그 푸른색을 더해갔었다.

바닷가에 서서 바다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들숨과 날숨처럼 거칠게 호흡하는 파도들, 태곳적부터 넘실대었을 그 파도들의 이랑마다 이미 봄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겨울 꽃이 지는 자리마다 진작부터 봄의 약속 가득한 꽃망울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난 오늘도 바람 부는 바다로 달려갔다. 생존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기나긴 인생 항해에서, 마침내 발견하여 도착한 항구는 내가 지나온 그 머나먼 항로를 명백히 증명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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