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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내가 고개를 돌릴 때는 네 목소리가 들릴 때였다. 시끌벅적한 시장골목에서 번잡한 도심에서 사무실에서도 너의 목소리는 단연 도드라졌다.

나직하고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 했으나 오히려 네 목소리는 내게 큰 울림으로 들려왔다. 목소리가 내 귀에 닿을 때마다 메마른 거리도 촉촉한 물기를 머금었고 다음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도시는 온통 진공 속에 빠진 듯했다.

네 목소리의 질감은 과즙 머금은 복숭아였고 단물 배인 사과향 껌 같기도 했다. 한 입에 베어 먹고 싶고 언제까지 질겅거리며 입안에 담고도 싶은 맛이었다.

네 목소리는 아주 짧은 순간 공간에 머물다 거짓처럼 시간 속으로 사라졌지만 네 목소리는 내게 주술로 남아 습관이 됐으며 어쩌면 내 실존이 됐다.

새벽 3시의 창가에서, 늦은 밤의 적막 속에서, 하루의 피로를 잊는 내 침실에서 네 목소리를 기다리는 나는 날마다 눈이 충혈 되었고 가슴이 타 들어갔다. 난 이제 네 목소리의 공명을 하루라도 느끼지 않으면 숨 쉬는 일조차 어려워졌다.

"이해란 무엇일까. 소통이 불가능한 채로 한 존재를 이해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그러니 이해한다는 건 곧 억압하는데 성공한다는 뜻이 아닐까."

네가 이 말을 했을 때 난 울고 싶도록 슬펐다. 이 말을 하면서 넌 아무런 억양의 굴곡도 없이 담담했지만 난 네가 자기부정의 늪에 빠져간다는 걸 직감했다. 넌 그때 네 삶을 증거하고 변호할 무언가를 찾고 있었겠지.

서로간의 실존을 언어로 소통한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언어를 통한 서로간의 소통이 끝없이 유예되고 무기력한 침묵만이 남을 때 우린 또 다른 방언이라도 익혀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사람의 몸무게는 바로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의 무게라고 한다. 그렇다면 인연의 무게는 몇 ㎏쯤일까." 그때 너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니. 넌 지금도 충분히 중력만큼 뚱뚱하다고 말해야 했을까.

"먼 여행지에서는 늘 내 부엌과 방, 나만이 사용하는 커피잔과 냄비, 잘 드는 부엌칼과 발닦개, 나만의 거울과 내 창가의 풍경이 사무치게 그립다. 그러나 돌아와 그들을 만나면 그것들이 나를 붙들어주기에는 너무나 보잘것없다."

넌 갓 서른 살부터 자동인형처럼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의 작동을 못 견뎌했고, 지젝이 말한 '그저 그런 삶(mere life)'이 아니라 '진정한 삶(real life)'을 살아야 한다고 발작처럼 말하곤 했다. 하지만 네 입술이 갈망으로 메말라갈 때 오히려 난 네 메마른 입술을 훔치고 싶었고, 건기(乾期)의 시간마다 들리는 네 목소리는 내겐 달콤한 수액이었다.

난 늘 너의 허기와 갈증과 사소한 취향까지 공감하려 했다. 어차피 너와 난 같은 언어를 쓰는 원어민이고 서로의 목소리에 매혹된 사람일터이니까.

네 목소리는 언제나 완전한 전언이었다. 너와 나만의 성채는 견고해져 갔고 둘만의 왕국에서 행복했다. 조곤조곤 네 목소리를 듣는 것은 함께 밥을 먹고 산책하고 여행하고 잠자는 거였다. 난 네 목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원초적 감촉의 전율에 감사했다.

네 목소리가 점점 가물거린다. 아쉽지만 오늘은 너와 그만 헤어져야겠다. 아름다운 나의 연인 책(冊)들이여, 이제 오늘은 안녕이다.

<" "로 인용한 글은 전경린,'나비', 늘푸른소나무, 2004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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