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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쌍권총이 있는 성적표와 함께 학사경고 통지서가 책상위에 놓여 있었다.

대학 1학년이 지나고 긴 겨울방학을 맞았다. 친구들과 전국유람(?)을 하고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졌을 때 고향집에 당도했다. 아버지가 날 호출하여 자리에 앉혔다. "군대 가라, 그것도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자원입대해라" 차분한 목소리로 다른 말없이 딱 한마디만 건네는 아버지의 표정엔 바위처럼 흔들림이 없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대꾸할 명분도 면목도 없었다. 군대라니. 이 들끓는 청춘을 3년간 국가에 저당 잡힌 채 지낼 순 없었다. 그때 무릎을 꿇고 간절한 목소리로 아버지께 애원했다. "아버지 다음 학기엔 수석 성적표를 보여드릴게요. 수석 못하면 그때 자원입대 하겠습니다." 그 약속을 지켰는지는 나중에 알려드리겠다.

난 그때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었으나 꾹 참았다. "아버지, 이 혼란스런 시국에 시험공부나 하고, 굴종이나 하는 대학생 아들을 원하세요?"

광주민주화운동의 뜨거운 기운이 아직 남아있는 캠퍼스는 연일 최루탄 내음이 배여 있었다. 5월 즈음해서는 캠퍼스 곳곳이 최루탄과 화염병에 불타고 학우들은 눈물 콧물이 뒤섞여 하나둘씩 땅바닥에 꼬꾸라졌다. 부역교수에겐 어용교수 물러가라며 강의실을 박차고 나왔다. 언제 또 휴강을 할지 알 수 없는 시절이었다. 캠퍼스를 배회하는 정보형사들과 눈인사를 건네던 시절, 강의를 제쳐두고 광주의 영상들을 몰래 돌려보며 울분을 토로하던 시절이었다.

아침 신문을 읽다가 묘한 기시감에 답답해졌다. 이런 역사가 왜 되풀이 되는 것일까. 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맴돌기만 하는 것일까.

내가 재수까지 하면서 정치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고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시대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학문,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모태명제만으로도 공부할 만한 분야라고 생각한 거였다. 4년간의 학부과정이 비록 수박 겉핥기의 과정일지라도 인간이 왜 정치적 동물인지 그 이유 정도는 배울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다.

아버지와의 약조로 2학년이 시작되자마자 공부라는 걸 제대로 해 보았다. 그때 읽은 책들이 30여년이 지나 아직껏 기억되는 걸 보면 꽤 열심히 한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정치는 모든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는 데이비드 이스턴의 말은 지난 30여 년간 정치를 말할 때마다 내가 인용하는 말이 되었다.

국가뿐 아니라 사회, 모든 조직체에서 가치가 권위적으로 배분되지 않을 때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정당이나 언론, 이익집단, 시민단체까지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할 때 정치과정의 마지막에는 시민참여만 남는다.

선거, 투표뿐 아니라 1인 시위, 주민청원, 공청회 참가, 정보공개 청구, 신문에 독자투고 하는 일, SNS에 자기 의견을 주장하는 것, 시위현장에 나가는 것 또한 개인이 정치권력이 되는 시민참여다.

정치적 무관심에 매몰되는 순간 천박하고 추악한 권력집단의 노예가 되어버리고, 국가까지 막장화가 되는 현실을 우리는 경험했다. 다수의 다양한 목소리와 가치를 묵살하는 권력의 악마성에 휘둘리지 않는 길은 스스로 올바른 정치권력이 되는 것뿐이다.

기원전부터 내려오는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는 명제가 그 당위성을 말해준다. 정치학개론은 이것만으로도 넘치도록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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