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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환

에세이스트

해피가 갔다. 아주 멀리 갔다. 이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갔다.

사람과 반려견과의 관계에서 유일하게 불행한 점이 있다면 개가 사람보다 더 빨리 죽는다는 사실이다.

해피의 15년간의 일생 중 마지막 2년은 내가 돌보지 못했다. 손자가 태어나면서 그 놈을 돌봐야했을 때 해피는 사돈집으로 보내졌다. 물론 사돈은 해피에게 나를 대하듯 극진한 사랑으로 보살폈다. 사돈개로서의 특권을 한껏 누리며 말년을 보냈으니 나와 살 때보다 더 만족스런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해피가 편안히 눈을 감고 양지바른 곳에 잘 묻어주었으니 안심하라는 전갈을 받았지만 내 마음은 한동안 술렁였다. 눈을 감기 전에 한 번 더 꼭 안아주고 너를 사랑했노라고 속삭여주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한 죄책감이 나를 괴롭혔다.

해피를 사돈댁으로 보낼 때, 언젠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로 남겨둔 해피의 사료며, 귀 소독제며, 샴푸며, 외출복을 아직 치우지 못했다. 그것마저 버린다면 이제 정말로 해피의 흔적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았다.

도대체 해피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것일까·

해피를 처음 만났을 때를 잊지 못한다. 해피는 초롱초롱한 눈을 번뜩이며, 늘씬한 네 다리로 온 집안을 휘저으며 돌아다녔다. 누구에게나 당당하고 도도했다. 앙증맞은 엉덩이를 실룩이며 나만 졸졸 따라다닐 때면 난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해피는 어느 총각개에게도 곁눈 한 번 주지 않고 우아한 품위를 유지한 숙녀개였다. 해피를 사모한 숱한 수컷개들이 상사병이 나서 밥을 못 먹을 정도가 되어 시름 거려도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 때 해피를 말렸어야 했다. 수컷개와 어울려 뛰어 달리며, 살가운 사랑도 하고, 둘이 아껴 보살필 2세를 가지라고 다그쳤어야 했다. 해피를 보내고 난 뒤 내가 제일로 후회하는 점이다.

이렇게 빨리 쪼그라들고, 병들고, 사그라지기 쉬운 육체였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래서 시간의 유한성과 냉엄함을 해피가 미리 깨우쳤다면 더 많은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삶을 살았을 거란 생각을 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해피는 그것조차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아는 해피는 매 순간 그 자체를 완성시키는 삶, 영속하는 현재만 살았다. 니체의 말처럼 '동일자의 영원한 반복'이라는 영원회귀를 순간마다 실천하고 향유하는 고고한 숙녀였다.

해피는 순간의 피조물이었다. 우리 인간은 끝없이 시간을 유예시키고 착취하는 시간의 피조물로 살아가지만 해피는 매 순간이 기쁨이었다. 우리는 행복을 계산하지만 해피는 그 어떤 순간도 재거나 계량화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간 해피는 내게 딸이었고, 친구였고, 애인이며 스승이었다. 내가 대학교육을 마칠 때까지도 배우지 못한 것들, 즉, 내 인생에서 알아야 할 귀한 가치들을 해피는 내게 아낌없이 가르쳐주며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창 밖에 장맛비가 내린다. 비 맞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던 해피가 또 떠올랐다. 해피는 산책길에 소나기라도 내릴라치면 쏜살같이 집으로 내달리던 깔끔한 숙녀였다. 지금 이 빗속에 해피는 편히 잠들고 있는지, 집에 가야된다고 나보다 앞장서서 재촉하던 그 자그마한 숙녀 생각으로 나는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오늘 밤 꿈속에서라도 해피와 함께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 해피는 기분이 좋을 때면 춤을 잘도 추었다. 나와 눈을 맞춘 채로 빙글빙글, 펄쩍펄쩍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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